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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의사

자기 상처를 건드린다고 ‘나쁜 의사’라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상처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사탕 발린 말을 하면서 정작 치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만 뜯어가는 의사를 나쁜 의사라고 할 것이지요.

하지만 영성적인 면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진정으로 치유할 마음이 있는 이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기피하고 반대로 자시들의 귀에 달가운 말만 해 대면서 정작 아무것도 내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 이를 ‘좋은 지도자’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사실 환자가 치료를 하지도 않은 의사를 분별하려는 것부터가 재미난 일입니다. 환자는 병이 다 낫고 나서야 그 의사가 정말 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헌데 치유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전에 단순히 자신의 느낌만으로 좋다 나쁘다를 결정해 버리고 거리를 두니 치유는 커녕 병은 더욱 악화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 치유가 이루어지려면 우리의 의지의 작용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기 싫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사랑은 의지에 관계된 것이고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껏 세상에 물들어왔으니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텔레비전을 보는 것은 익숙하고 쉬운 일입니다. 헌데 그런 습관에 사로잡힌 우리가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두고 기도를 시작하려면 엄청난 의지적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요. 이를 영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하고 흔히 하는 말로 ‘회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돌이키는 행위를 말하지요.

의지를 쏟아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는 반드시 영적 고통이 수반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단 낫고 나면 훨씬 수월해질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니 그 다음 단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완전히 개선되고 나면 마치 우리가 전에는 패스트 푸드 음식을 좋아하다가 나중에는 건강한 음식을 즐겨 먹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영적으로 건강한 말과 행동에 더욱 집중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하느님을 명료하게 알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영혼에 가장 건강을 선사할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의 영혼이 세상에 찌들어 있는 동안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말과 행동이 더욱 달갑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혼은 더욱 병들어가게 되지요.

나의 내면을 살펴 내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더 사랑하는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영적 지도자 중에 나의 의지에 반해서 하느님에게 더욱 나아가게 도와주는 이들을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지금 상태 그대로 좋으니 그냥 살고 싶은 대로 살라고 하는 영적 지도자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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