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적 구원은 없습니다. 마치 조립완구를 만들듯이 이런 저런 것들을 조합하면 완성되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고 성사적 행위를 완수한다고 구원이 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에는 그 핵심에 선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맑기만 하다고 해도 안됩니다. 선을 향한 우리의 노력이 섞여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혼동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기계적인 구원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이런 저런 성사적 요소들이 산재해 있고, 예비자 교리때부터 ‘의무적인 것’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기 때문에 성사의 사효성(일 그대로 이루어지는 효과)에 대한 굳은 마음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에 단순히 참여하기만 해도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런 기계적인 구원관으로 인해서 형식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은 하나도 없는데 의무만 채우면 적어도 지옥은 가지 않는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마음’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정말 ‘중립’을 유지하면서 성사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걸까요? 정말 그 마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즉,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면서 몸만 성당에 나와 있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몸이 성당을 빠져나오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공연한 세상 정보에 빠져들고 텔레비전 보기를 즐기고 세상의 온갖 환락을 즐기면서 하느님에게서는 갈수록 멀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세상에 마음이 빠지지 않은 채로 나머지 성사생활을 준수한다면 적어도 구원은 보장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세상에 푹 잠겨 있는 채로 성사의 의무만을 준수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의 구원은 장담하기 힘이 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계적 성사 행위가 혹시 단순히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혼동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기계적인 구원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이런 저런 성사적 요소들이 산재해 있고, 예비자 교리때부터 ‘의무적인 것’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받기 때문에 성사의 사효성(일 그대로 이루어지는 효과)에 대한 굳은 마음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에 단순히 참여하기만 해도 뭔가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런 기계적인 구원관으로 인해서 형식주의가 나타나게 됩니다. 마음은 하나도 없는데 의무만 채우면 적어도 지옥은 가지 않는다는 식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마음’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정말 ‘중립’을 유지하면서 성사생활에 참여하고 있는 걸까요? 정말 그 마음이라는 것은 아무런 동요도 하지 않고 있는 걸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마음은 그대로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즉, 우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면서 몸만 성당에 나와 있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몸이 성당을 빠져나오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공연한 세상 정보에 빠져들고 텔레비전 보기를 즐기고 세상의 온갖 환락을 즐기면서 하느님에게서는 갈수록 멀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세상에 마음이 빠지지 않은 채로 나머지 성사생활을 준수한다면 적어도 구원은 보장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이 세상에 푹 잠겨 있는 채로 성사의 의무만을 준수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의 구원은 장담하기 힘이 듭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기계적 성사 행위가 혹시 단순히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고 외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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