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것은 채워주면 됩니다. 하지만 넘치는 것, 혹은 넘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모자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에게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교만, 자만이라는 것은 스스로 필요를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자란 어른으로서 스스로 독립성을 키워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일 뿐입니다.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영원한 자녀이어야 마땅합니다. 헌데 이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자만하는 이들', '교만한 이들'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뚱아리를 건사해야 하고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화'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탐욕이 시작됩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를 손에 쥐어야 만족할까요?
때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나치게 욕심내는 이들의 씁쓸한 결말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성주가 참외로 한 해에 6000억을 벌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하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지키고 살았을까요? 잉여 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독한 약재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부수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적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생태적인 환경에서 자연은 '가난한 자들'이 아닐까요? 또한 무분별하게 벌어들인 돈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인간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재화를 지니고 나면 그 재화를 쓸 곳을 찾게 마련이고 그 사용처는 주로 자신의 쾌락을 위한 목적이 됩니다. 거기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영적인 타락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훗날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몇가지 신심 활동으로 하느님 앞에 항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꼬박꼬박 지킨 주일미사와 거르지 않은 판공이 하느님 앞에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지는 오직 그분 앞에서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힌트는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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