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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않는 고집






믿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번다면 돈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통해서 오고 내 손 안에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믿음이 없던 무신론자 집안에서 사제가 탄생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자녀대부터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라고 불립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언뜻 보기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자체 안에 그 믿음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 우리의 육은 관찰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의 활동을 통해서 영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악한 행동을 합니다. 반면 선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선한 행동을 합니다.


믿음 안에서 다루는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에 따라서 처분을 받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믿는 이들의 상급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뒤따르는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육체적인 영역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남은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뿐이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적인 삶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잃을 수 없고 오직 '거래'를 통해서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 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도 봉사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만일 봉사를 한다면 뭔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있기에 할 뿐입니다. 절대로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 속에서 보다 큰 세상을 살아갑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이 약속하신 것들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그 약속을 믿고 때로는 세상에서 소중해 보이는 것들을 포기할 수 있게 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가 혼자 사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믿지 않는 이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라자로를 보았지만 그의 마음에는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에 작은 손상이라도 입을까 노심초사했을 것입니다. 라자로가 바란 것은 많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 그가 다 쓰고 남은 것으로라도 자신의 절대적인 필요를 채우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아무리 소용없는 것이라도 나누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테니까요.


세상은 이런 부자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은 내 것을 철두철미하게 챙기며 절대로 남에게 내어주지 않습니다. 내 시간, 내 노력, 내 재산, 내 명예, 내 권력, 내 가족... 이 모든 것에 함몰되어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내어준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갑니다.


반면 믿는 이들은 비록 세상에서 좋은 것을 얻지는 못해도 믿음 안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생의 마지막이 도래했을 때에 그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마치 라자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위로를 받는 것처럼 우리 믿는 이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고집스럽습니다. 그들은 사실 믿음으로 초대하는 수많은 표징들을 주변에서 관찰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기를 선택하고 고집스럽게 현세의 만족을 선택합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예언자는 여러분 앞에 서서 믿음을 증언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순하게 받아들여질까요? 그건 여러분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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