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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는 사제를 공격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1. 마귀를 쫓아냄

2. 질병을 치유함

이 두 가지의 힘과 권한이 선물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과 권한은 오늘날의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주어집니다. 사제들은 공인받은 수단을 통해서 이 힘과 권한을 발휘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고해성사이고 병자성사입니다. 사제들은 성사 안에서 사람들에게 마귀를 쫓아내 줄 수 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제는 공인받은 영역 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서도 이 힘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이를 준성사라고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청하는 안수가 효과를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 평화를 회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집전자의 의지와 수용자의 의지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그저 좋은 거니 받아보자는 식이라면 아무리 진중하게 축복을 내리고 더러운 영에게 떠나라 명해도 그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대 세계에 마귀는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 고유한 영의 영역이 있고 마귀는 이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인데 그 영의 의도가 굉장히 사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인 거짓의 아비를 따라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아가 자신의 악한 의지를 선한 것인양 포장해서 퍼뜨립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본질적인 사명으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주었듯이 마귀가 하는 본질적인 사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에 있어서 이 마귀의 공격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사제직'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군대를 공격한다면 수많은 졸병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수많은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군을 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제는 영적인 장군의 역할을 차지합니다. 사제 한 명이 사라지면 그가 이룰 수 있는 수많은 구마와 치유의 기회들이 동시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세기에 들어서 마귀들은 특별히 사제들을 공격합니다.


사람들이 험담을 할 때에 더욱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제에 대한 험담입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험담은 단순한 한 인간에 대한 불만으로 그치는 것이지만 사제에 대한 험담은 그 사제의 인격과 동시에 그 사제직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곧 그 사제직을 선물하신 예수님에게 반기를 드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제에 대한 험담을 하는 사람들은 마귀를 배후에 두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일 불만이 있다면 그 사제에게 가서 직접 조언을 할 일이지 그것을 주변에 퍼뜨려 사제직 자체에 대한 신뢰도를 하락시키려는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시도는 굉장히 사악한 일이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들은 훗날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변명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종류의 험담에 귀를 빌려주는 이들도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질 수 있지만 특별히 사악한 호기심이 있습니다. 거룩한 것이 망가져가는 데에 크게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자신의 내면의 어둠을 드러내는 셈입니다. 사제나 수도자의 험담을 곧잘 듣고 주변에 퍼뜨리는 사람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그저 듣기만 했다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멈출 수 있고 그런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을 식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제자들은 모든 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날 때에 증거를 남깁니다. 그것은 바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입니다. 저 역시 같은 소명을 부여받은 사람으로서 떠날 날을 얼마 남겨두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끝까지 기회를 선물했고 이제 남은 것은 그것을 받은 이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마귀들의 흔한 모습에서 발견되듯이 그들은 복음의 빛을 받아들여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예수님에게 마시라고 식초를 건네는 이들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의 결산을 받게 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에게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즘은 하느님에게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큰일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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