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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믿지 않는 고집

믿는다는 건 정말 신기한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번다면 돈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통해서 오고 내 손 안에 있는지 없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믿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믿음이 없던 무신론자 집안에서 사제가 탄생할 수도 있고, 정반대로 가족 구성원이 모두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자녀대부터 그 어떤 것도 믿지 않는 상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라고 불립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언뜻 보기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 자체 안에 그 믿음의 신비가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영과 육으로 되어 있고 우리의 육은 관찰되지만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영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육의 활동을 통해서 영의 상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악한 행동을 합니다. 반면 선한 영을 담고 있는 육은 선한 행동을 합니다. 믿음 안에서 다루는 것은 '자유의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도 있고 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에 따라서 처분을 받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믿는 이들의 상급을 받을 것이고 믿지 않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뒤따르는 것들을 받을 것입니다. 그럼 믿음이 있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육체적인 영역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 없다면 남은 것은 나에게 주어진 것들뿐이기 때문에 사람은 현세적인 삶에 집착하여 살아갑니다.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잃을 수 없고 오직 '거래'를 통해서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 취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자연스럽게도 봉사라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만일 봉사를 한다면 뭔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있기에 할 뿐입니다. 절대로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믿음 속에서 보다 큰 세상을 살아갑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

믿음을 위하여 싸우라

성경은 믿음을 위해서 '싸우라'고 표현합니다. 왜냐하면 현세의 삶에서 믿음은 그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투쟁하여 쟁취해야 하는 어떤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원리를 모르는 게 아닙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영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올바른 신앙을 얻고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선물'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모든 은총은 그 자체로 선물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받은 것을 지켜내야 하고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의 영향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은 더욱더 그 농도를 더해가고 있고 세속성의 공격은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멍청하게 보이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치 과학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줄 듯이 상상하면서 믿음의 생활, 희생의 생활,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생활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치부해 버립니다. 심지어는 성당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합니다. 그들은 언뜻 외부적으로는 신앙에 열성인 것 같지만 신앙과 현실이 충돌하는 영역에서 언제나 현실에 양보를 해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늘 전투에서 지는 셈입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시오 빌라도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그런 상황이 다가왔을 때에 같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자녀들이 성당에 가기 싫다고 할 때에 뭐라고 해야 할까요? 술자리의 친구들 사이에서 내 신앙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야 할 때에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주님을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부끄럽게 여기고 숨기려고 할까...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은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저 나름의 걱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걱정은 '영적인 상태에 대한 염려'를 말합니다. 세속에 속한 이들은 모든 걱정을 하지만 단 하나 영혼의 처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시온에 살면서도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지어 성당을 다닌다면서도 스스로의 영혼의 처지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상아 침상과 안락의자가 뜻하는 것은 세속의 쾌락을 의미합니다. 영혼에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안락', '안정', '세속적 평화’뿐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더 많은 부와 명예, 권력을 추구하면서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쾌락에 도취되게 됩니다. 어린 양이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표상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위해서 어린양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기도합니다. 어린양은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선하고 착한 이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곧잘 세속 사람들에게 희생양이 되기 마련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안락과 편의를 위해서 하느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이 일상입니다. 노래와 악기에 대한 이야기는 그들이 드리는 헛된 경신례를 의미합니다. 그들은 신앙인을 흉내내어 마치 거룩한 찬가라도 올리듯이 미사를 드리고 성사도 받지만, 실상 그들은 그들의 쾌락에 취해 도리어 하느님을 모욕하는 행위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정치인이 선거 때가 되면 미사에 나와서 거짓 신자 흉내를 내는 것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또 자신의 본질의 삶은 하느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도 적잖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향유는 세속의 사치와 쾌락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의 욕구에...

원로, 수석 사제, 율법 학자

원로들 - 사람들의 존경을 구하는 이들 수석 사제들 - 권력을 추구하는 이들 율법 학자들 - 교만과 자기애에 사로잡힌 이들 언뜻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좋은 평판을 지니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좋은 명예를 지키는 것은 훌륭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사람들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리를 거스르는 일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공동체적인 악을 형성하고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악에 저항하지 않고 함께 휩쓸려 가는 식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모두 절제없는 음주라는 악습에 시달릴 때에 그 친구들과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도 술이라는 악습에 빠져드는 식입니다.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참된 권력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집니다. 하지만 이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람들은 오류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권력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국가 기관의 권력자들에게 기본적으로는 순명해야 하고 교회의 권력자에게도 순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참된 권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직, 즉 봉사하는 직분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고 이 권력으로 사람들을 내가 욕구하는 대로 부리고자 할 때에 문제가 생겨납니다. 이런 이들은 참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구분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권력을 무시하게 됩니다. 성경은 항상 하느님의 율법을 올바로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법의 올바른 정신을 알아 그것을 지키는 것과 법 그 자체의 지적 우위성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공격하려고 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율법학자가 상징하는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적인 우위를 바탕으로 교만에 빠져들고 그 교만을 바탕으로 자기 스스로의 욕구대로 남을 억누르는 데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이들의 배척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도 같은 운명...

마귀는 사제를 공격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1. 마귀를 쫓아냄 2. 질병을 치유함 이 두 가지의 힘과 권한이 선물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힘과 권한은 오늘날의 사제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게 주어집니다. 사제들은 공인받은 수단을 통해서 이 힘과 권한을 발휘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고해성사이고 병자성사입니다. 사제들은 성사 안에서 사람들에게 마귀를 쫓아내 줄 수 있고 병을 고쳐줄 수 있습니다. 또한 사제는 공인받은 영역 뿐만이 아니라 그 외에서도 이 힘을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이를 준성사라고 합니다. 때로 사람들이 청하는 안수가 효과를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이 사제의 기도를 통해서 평화를 회복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집전자의 의지와 수용자의 의지가 중요한 영역을 차지합니다. 그저 좋은 거니 받아보자는 식이라면 아무리 진중하게 축복을 내리고 더러운 영에게 떠나라 명해도 그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현대 세계에 마귀는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의외로 굉장히 가까운 곳에 존재합니다. 인간은 그 내면에 고유한 영의 영역이 있고 마귀는 이를  파고듭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인데 그 영의 의도가 굉장히 사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비인 거짓의 아비를 따라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아가 자신의 악한 의지를 선한 것인양 포장해서 퍼뜨립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본질적인 사명으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주었듯이 마귀가 하는 본질적인 사명은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 놓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에 있어서 이 마귀의 공격 가운데 적지 않은 부분은 바로 '사제직'을 향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군대를 공격한다면 수많은 졸병들을 처리하는 것보다 수많은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장군을 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일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제는 영적인 장군의 역할을 차지합니다. 사제 한 명이 사라지면 그가 이룰 수 있는 수많은...

듣고 실행하기

첫째, 듣는가?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정보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 정보는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는 것이 있고 우리가 찾아 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우리가 듣는 것이 있고 듣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듣고 있는지 올바로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1차원적으로는 당연히 성경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성경의 말씀도 누군가가 올바로 풀어주지 않으면 엉뚱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난 이유 가운데 하나도 성경의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JMS는 성적인 타락을 창세기를 통해 정당화 하려고 하고 신천지는 묵시록을 핑계로 144000명을 모으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올바로 듣는다는 것은 성경의 올바른 맥락을 이해하고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거룩함을 더해가도록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느님깨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혹자는 성경을 그저 많이 읽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고 또 성경 베껴쓰기를 여러 번 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성경을 올바로 읽었다면 그런 자만이 오히려 자신들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자신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굳이 성경이 아니더라도 하느님께 우리를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초대의 기회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침묵'이 그 일을 하기도 합니다. 엉뚱한 친구들과 어울려 주변의 온갖 잡다하고 어두운 곳에 정신을 팔기보다는 차라리 고요함 중에 침묵하는 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절실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둘째, 실행하는가? 충분히 들었다면 실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보석을 발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석을 세공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방향을 그저 아는 것으로 우리는 구원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아는 바를 실행해야 합니다...

부끄러움

어린 시절 우리는 또래 집단에게서 제외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씁니다. 그래서 한때는 그 값비싼 패딩이 유행을 탄 것도 그것이 또래 집단에서 통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가 중요하고 그 친구에게서 배척당하는 것은 부끄러움이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어딘가로 이사를 가면서 전에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너무나 쉽게 멀어지고 잊혀질 수 있다는 것은 다들 한 번씩 하는 체험일 것입니다. 물론 시골 지역에서는 그럴 일이 잘 없기에 더욱 과거에 고착화 되기도 합니다. 즉, 여전히 사춘기 시절의 집착을 안고 사는 어른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흘러가고 지나가게 마련입니다. 전에 소중하다고 여겼던 가치들은 시대가 흐르면서 지나가게 됩니다. 지금도 삐삐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이 소중히 여겨지던 때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기기들이 등장해서 그 자리를 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변치 않는 가치, 그 가치의 주인이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것에서 멀어질 수 있고 가치는 변하는 것이 되지만 오직 한 분 하느님에게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이들이 참된 신앙인이 됩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신앙 선조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지니던 관직을 잃고 유배를 당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그들이 장사의 수단이 되니까 별의 별 공원을 다 만들어서 그들을 기념하기도 합니다. 현대에도 참된 신앙인은 존재하고 그들은 세상 사람들에게 천더기 취급을 받습니다. 이 재빠르고 똑똑하게 굴러가는 세상 속에서 신앙인들은 뭔가 어리석어 보이고 허튼 짓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사라는 것을 제 잇속만 챙기고 최소한의 시간만을 투자하는 것일 뿐, 성당에서 봉사를 왜 해야 하는지, 왜 엉뚱한 시간을 소비해야 하...

그 모든 것을 당하고도 이겨내리라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은 하느님의 자녀들의 운명을 그려냅니다. 그들은 반대를 받고, 고발 당하고, 단죄 당하고, 환난, 역경, 박해를 겪고 때로 굶주리기도 하며 헐벗기도 할 것이고 위험과 칼이 들이닥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당하고도 이겨내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그러한 것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일들은 다가올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약삭빠른 그들은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실행할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의로운 이들을 희생제물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는 하느님에게 바치지 않지만 다른 이의 자녀가 하느님에게 바쳐져 자신들을 위해서 신께 기도하기를 바라는 식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온전히 간수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더 늘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생명을 깎아서 다른 이들을 하느님께로 초대하고자 애쓰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결과는 하느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것을 절대로 잊지 않으십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을 믿고 있고 그분을 믿기에 그분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보는 것을 일반적으로 '빛'이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사실 빛은 보다 다채로운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매개체로 보았을 대에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빛'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성'도 빛이 됩니다. 이성은 사고의 과정을 통해서 전에는 모르던 사실을 깨닫게 해 주니까요. 마찬가지로 '신앙'도 빛이 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줍니다. 성경 안에서 나타나는 '빛'은 다름아닌 신앙의 빛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가장 밝은 광원이 되시고 다른 모든 것들은 그분에게서 빛을 받게 됩니다. 1독서의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라는 말에서 우리는 앞서 말한 신앙의 참된 빛에 대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이 빛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세상의 빛에만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는 마치 스테인드 글라스를 태양빛을 통해서 보지 않고 실내의 빛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본래 사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의 빛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람을 그가 가진 재산과 학력으로 보고 그가 지닌 영혼의 빛으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가치 없는 사람에게 대단한 가치를 부여하고 가치 있는 사람을 무시하게 됩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빛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벌을 받는 것처럼 비춰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살아갈 때에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많은 것을 빼앗기고 학대 당하고 박해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차 있었고 이제는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시험당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시련이 모두 끝났을 때에 우리는 먼저 하느님께 나아간 이들의 뒤를 따라 찬란한 빛...

과연 얼마를 드려야 하느님께서 만족하실까?

우리는 거래를 할 때에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도 이득이 되고 상대도 만족할 만한 적정선을 찾고자 합니다. 동업하는 사람들끼리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눌지, 60대 40으로 나눌지, 유산을 나누는 형제들끼리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과연 하느님은 얼마에 만족하실까요? 무엇을 드려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에 나오듯이 십일조라고 해서 10분의 1이면 될까요? 아니면 우리 천주교는 아무래도 더 야박하니까 30분의 1 정도로 퉁칠까요? 사람들은 사실 어마어마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건 하느님과 우리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고 전권을 쥐고 계시고 우리는 그 피조물입니다. 무엇이 적정할까요? 답은 '모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드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럼 우리가 모두 봉쇄 수도원이라도 들어가야 한다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제나, 평신도냐, 수도자냐 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성소의 차이일 뿐입니다. 본질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 생의 본질은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느님의 것을 우리가 빌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집사처럼 애시당초 집사가 다루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집사의 것이 아닌 셈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우리의 생명, 내 가족, 내 재산, 내가 지닌 모든 사회적 지위와 명예, 권력 모조리 하느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원래 모두 하느님의 것 가운데 일부를 위탁받아 쓰는 셈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전부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마음으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일부를 하느님에게 줘서 그분을 일시적으로 만족하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원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하느님은 훗날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 가실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죽고 난 뒤에 내가 남겨놓은 것이 내 자식들 중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바라신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면 그것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이 좋아하시는 일, 당신이 바라시는 일을 모두 알려 주셨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입에 밥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밥을 먹고 싶다는 뜻을 품었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우리 신앙인들을 남겨두시는 이유는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구체적인 도구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듣기 좋은 허울뿐인 말이 아닙니다. 이는 구체적인 삶의 실천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나가야 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도 겨우 챙기는 수준의 신앙생활을 합니다. 특히나 더 열심하다는 사람에게서 이런 특징은 쉽게 발견됩니다. 오히려 갓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더 큰 열정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심심찮게 발견합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면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만하는 이들

부족한 것은 채워주면 됩니다. 하지만 넘치는 것, 혹은 넘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겸손이라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모자란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에게 의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교만, 자만이라는 것은 스스로 필요를 챙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다 자란 어른으로서 스스로 독립성을 키워야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일 뿐입니다. 우리는 무한하신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영원한 자녀이어야 마땅합니다. 헌데 이를 망각하고 스스로를 하느님 자리에 올려 놓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자만하는 이들', '교만한 이들'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할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뚱아리를 건사해야 하고 가능한 한 '좋은 환경'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화'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서 그 이상의 것을 거두어 들이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탐욕이 시작됩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정도를 손에 쥐어야 만족할까요? 때로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나치게 욕심내는 이들의 씁쓸한 결말을 보면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성주가 참외로 한 해에 6000억을 벌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전하는 우리들입니다. 과연 그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잘 지키고 살았을까요? 잉여 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독한 약재를 분별없이 사용하고 부수적으로 생겨난 수많은 쓰레기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한 자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은 적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과연 생태적인 환경에서 자연은 '가난한 자들'이 아닐까요? 또한 무분별하게 벌어들인 돈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요? 인...

군중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

군중은 필요를 찾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들의 필요에 적절히 부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군중은 예수님을 가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이용하던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에게 있던 '불편'을 없애주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나머지 일들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그분의 나라가 퍼져 나갈 수 있는 기회라면 무엇이든지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그분은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셔야 하는 일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필요를 찾을 뿐이고 서로의 이해관계가 어울리는 동안 한데 모여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 가운데에는 하느님의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은 인간의 필요를 부수적인 요소로 봅니다. 그리고 핵심이고 본질을 전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리고 허락된 때가 지나고 나면 자신의 사명이 자신을 부르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한 가지 재미난 장면은 예수님의 꾸짖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유하고 온화하고 정적인 분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이나믹 하신 분이십니다. 성전에서 정화 사건도 그렇고 오늘 복음에서 사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소리치는 것을 가만 두지 않으십니다. 헌데 마귀들은 정작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소리를 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도무지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의도로 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마귀들은 아무리 거룩한 말이라도 더러운 목적으로 합니다. 심지어는 누구를 칭송하는 것 같더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거나 그가 하는 일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정반대로 그가 하는 일을 가로막고 방해...

낮에 속한 사람 /어둠에 속한 사람

오늘 독서와 복음 안에서는 두 가지 상반된 사람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낮에 속한 사람, 빛의 자녀로 불리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을 본문에서만 꼽아 보자면 다음과 같은 요소를 들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사람 /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 깨어 있다는 것은 당연히 영혼의 인지를 의미합니다. 육체로는 열심히 활동하고 있지만 영혼이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외적으로는 너무나도 바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활동 안에서 영혼이 깨어 있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쉽게 분노하고, 절망하고, 탐욕을 부리고, 다투고 싸우는 것이 일상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조차 바쁩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처럼 어느 누구보다도 바쁘게 신앙을 꾸려 나가는 것 같지만 그 어느 것에서도 열매 맺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기도는 형식을 채우는 것뿐이며 그들이 드리는 예배 역시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깨어 있는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고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으며 항상 기쁘게 주님의 명령에 깨어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는 가장 작은 일 안에서도 참된 신앙을 담아 보람을 찾고 주어지는 소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갑니다. 두 번째 특징은 서로를 신앙 안에서 챙긴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헛된 약속을 하고 자주 만나고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일들은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신경 쓰는 일입니다. 세상에 속한 이들은 언뜻 서로를 챙기는 것처럼 보이며 서로의 만남의 시간을 더 자주 가지려고 하고 애써 그 관계를 유지하려고 안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흔히 세속의 주제로 가득 차 있고 하느님을 되새기거나 자신의 내면의 성장을 꾀하는 일은 없습니다. 모이기만 하면 누군가의 험담을 즐기고 모인 사람들끼리도 마음이 맞지 않아서 흔히 다투고 싸우기가 일쑤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가능한 기회 속에서 서로 신앙의 여정을 챙기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