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마르코 9장 5절)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 앞에서 떠나 달라고 사정하던 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같이 지내면 좋겠다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즉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굉장히 피상적인 차원에서 합니다. 그것이 정말 좋은지, 또 그것이 정말 나쁜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것으로 분별하고 말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보여도 내면에 썩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엉망이라도 내면에 진정한 가치를 품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탕발림’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실체는 쓴데 그것에 사탕을 발라 놓으면 받아들이는 것이 통상적인 우리의 반응입니다. 높은 직책을 수여하면 그것을 무턱대고 좋다고 수락하는 사람이 있고 진중하게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진중하게 생각하고 수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성숙 단계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세상적 유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은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라보는 셈이지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을 분별할 줄 알고 그 내면의 가치를 알고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정도 자란 영혼이지만 아직 미흡한 상태입니다. 분별력만 있을 뿐, 내면의 인내와 용기와 같은 가치들은 자라지 못했지요.
분별까지 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힘들 줄을 알면서도 수락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희생’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내면의 가치는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이들은 세상 안에서 가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같이 살자고 떼를 쓰던 베드로, 하지만 머지 않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차례의 과정을 거쳐 결국 베드로는 주님의 으뜸사도 자리에 적합한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베드로는 처음 예수님 앞에서 떠나 달라고 사정하던 이였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같이 지내면 좋겠다고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굉장히 즉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거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굉장히 피상적인 차원에서 합니다. 그것이 정말 좋은지, 또 그것이 정말 나쁜지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드러나는 것으로 분별하고 말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보여도 내면에 썩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엉망이라도 내면에 진정한 가치를 품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탕발림’이라는 말이 있듯이 원래 실체는 쓴데 그것에 사탕을 발라 놓으면 받아들이는 것이 통상적인 우리의 반응입니다. 높은 직책을 수여하면 그것을 무턱대고 좋다고 수락하는 사람이 있고 진중하게 거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가서 진중하게 생각하고 수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의 성숙 단계는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것이지요.
자신에게 좋아 보이는 세상적 유혹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이들은 영적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바라보는 셈이지요.
나아가서 그러한 것들을 분별할 줄 알고 그 내면의 가치를 알고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어느정도 자란 영혼이지만 아직 미흡한 상태입니다. 분별력만 있을 뿐, 내면의 인내와 용기와 같은 가치들은 자라지 못했지요.
분별까지 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힘들 줄을 알면서도 수락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희생’하는 이들이며 이들의 내면의 가치는 참으로 고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런 이들은 세상 안에서 가리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같이 살자고 떼를 쓰던 베드로, 하지만 머지 않아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을 부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차례의 과정을 거쳐 결국 베드로는 주님의 으뜸사도 자리에 적합한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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