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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오신 곳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안다고 하지만 알지 못합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그들은 아는 것만 알고 보다 중요한 것, 알아야 하는 것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나자렛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내면’을 식별하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의 외적 출신만을 분별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알아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것은 그의 ‘외모, 학력, 고향, 경제 수준’ 등등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그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하고 딱히 관심도 없습니다. 물론 뒤늦게 그의 진정한 본질에 대해서 알게 되어 실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다른 경우에는 그의 본질을 낮춰 보았다가 가로늦게 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을 알아뵙고 찬미를 드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수님은 이미 여러번 우리 가운데 계셨고 우리는 그분을 무시하거나, 몰골이 흉하다고 생각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하거나, 지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그분을 외면한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만나는 상대의 내면을 분별하기 한참 이전에 이미 그의 외모를 바탕으로 벽을 쌓아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그나마 먹히는 이유는 ‘사제’라는 외적 조건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 제가 볼리비아의 원주민 청년 모습 그대로 다가갔더라면 저는 무시당하고, 기피당하고, 심지어는 ‘동남 아시아’라는 별명과 더불어 조롱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오는지 안다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분을 분별하지 못하며, 그분의 제자들도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저마다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을 내세우는 이들을 따르고 추종합니다. 세상에서 지니고 있는 뛰어난 재주 하나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드높이면서도 하느님의 전능을 드높일 줄을 몰랐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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