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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들의 상호 연계성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이들과 상호작용을 주고 받습니다. 미친듯이 욕을 해대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정상일 리가 없고, 정반대로 이웃에게 따스한 미소를 건네고 남을 돕기 위해 발벗고 나서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그런 일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나 무죄한 아이는 마치 말랑말랑하게 녹아 있는 초와 같아서 어른이 누르는 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자국이 남게 되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으면 그렇게 남게 되고, 추악한 것을 새겨 넣으면 그대로 남게 됩니다.

물론 회복도 가능합니다. 미움으로 다친 마음은 사랑으로 회복이 됩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지요.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었는데 아주 더러운 경험으로 전체 그림을 망쳐 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내가 하는 말 한마디, 내가 보여주는 실천 하나가 이미 다른 이들에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무심코 던지는 부정적인 말과 행동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반대로 내가 하는 선한 말, 아름다운 말과 행동은 상대를 치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나쁜 것을 던지면서도 그에게 주먹질을 하지 않았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돌심장을 지닌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관계, 하느님께서 날더러 그의 도움이 되라고 소명을 주신 관계가 아닌 이상은 가능하면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그가 남편, 자녀, 부모와 같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왜 그런 이를 주변에 두셨고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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