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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증언하는 이

“당신이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마르 14,61-62)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대사제의 저택에서 있었던 심문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는 부분입니다. 이 순간 예수님은 ‘진실’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된 진실에 우리는 모두 마음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서 안에는 특별히 예수님의 ‘진실함’이 묻어나오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특히나 예수님께서 두 번씩 ‘진실로 진실로’라고 표현하는 부분들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 ‘진실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찬양받으실 분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비록 그분의 육신 생명은 이스라엘의 시골 마을 나자렛 동네 출신의 목수의 아들에 불과하지만 그분의 영은 거룩한 영, 바로 하느님에게서 비롯하는 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의 구절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하느님이시지만 사람의 아들이 되어 오신 분을 일컫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이라는 표현은 전능하신 분의 가장 가까운 자리, 특별한 위치가 부여된 자리, 그분의 모든 권능을 수여받는 직분을 말합니다. 하늘의 구름이라는 것은 드높은 천상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름 기둥이 다가와 그들을 이끌고 이집트 병사들을 가로막아 주었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은 때가 되어 하늘의 구름이라는 전능함을 바탕으로 다가오셔서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고 그와 반대되는 세력을 가로막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을 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심판은 종료되고 사람들은 그분이 하느님을 모욕했다고 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때를 기다려 이 증언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고도 이 증언을 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증언은 ‘진실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진실을 수호하신 것만큼 진실을 증거하는 자들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 이전에 물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와 똑같은 말을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손을 씻고 물러나 이 일과 관계 없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고 하지요. 진실을 왜곡하는 악한 군중의 무리가 되어서도 안되겠지만, 진실에서 물어나 무책임해지는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죄라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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