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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를 찾는 사람들

저는 처음에는 ‘저를 이끌어 주세요’라고 하는 이들을 이끌면 되는 줄예 알았습니다. 참으로 순진하고 단순하고 무식했던 것이지요. 허나 그 어설픔이 상대를 이끌기는 커녕 도리어 엉뚱한 곳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신중하게 되었습니다. 소경 상태의 지도자는 다른 소경을 이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끌어 달라는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알게 되지요. 대부분의 사람은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먼저 어딘가로 이끌려 가고 있는 자신을 멈춰 세우는 게 필요합니다. 그럴 의욕이 없이 그저 누군가가 뭔가 있어 보이니 대놓고 부탁하는 것 뿐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전혀 바뀌지 않으려고 하면서 누군가가 다가와서 기적 같은 능력으로 그의 모든 고난을 없애 주기를 바라는 것을 ‘이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영적 이끔의 과정에는 본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본인의 의지적 내어맡김 없이는 성취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학적 지식을 늘린다고 그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아는 것을 실천하기 시작할 때에 그가 변화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누구를 믿을 것입니까? 누구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나이에, 신분에, 학력에, 출신에 가리워 전혀 엉뚱한 사람을 내세우고 있으니 말입니다. 서울대 출신의 나이 지긋한 외국 유학파 박사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마음이 맑은 청년의 지혜 가득한 말은 아예 시작부터 귀를 닫아 버리는 형편입니다.

사람들은 막연하게 ‘좋은 것’을 느낄 뿐, 그것이 실제로 좋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만일 정말 좋은 것이었다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그 땅을 사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리 저리 간을 보는 중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간을 본다고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오직 전적인 헌신을 통해서만 알게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누군가와 불화가 있어요 도움이 될 한마디 해 주시지요.” 그러나 이렇게 부탁하는 이에게 저의 한마디는 별다른 효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저 좋은 책을 한 권 읽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가 정말 자신이 바뀌고자 한다면 먼저 본인 스스로를 진실하게 살피고 반성할 것입니다. 진지하게 그 작업에 임하는 사람은 초반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거기에서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진보하는 데에 필요한 방향이 필요한 게 아니라 당장 빠져들어있는 어둠에서 스스로를 구해야 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그러나 그 어둠이 어둠인지조차 모르니 남과 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 싸움을 즐길 뿐입니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이를 보내실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가서 ‘왜 당신은 저를 돕지 않는거지요?’라고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본인을 바라보십시오. 보지 못하는 이에게 화장법을 가르쳐서 무얼 한단 말입니까? 먼저는 두 눈에 묻어 있는 숯검댕을 떼어 내는 것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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