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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을 평가하기

여러분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평가해 보십시오. 어떤 결과가 나오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방금 무언가를 하셨을 것입니다. 식사를 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을 수도 있고, 정말 중요한 결제를 마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부분이 아니라 내적으로 여러분이 한 일을 살펴 보십시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여러분 스스로 분별해 보십시오.

예컨대 ‘식사’를 하는 것이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행위였는지, 아니면 식사 중에 식사를 준비한 어머니에게 짜증을 내는 행위였는지, 아니면 입으로는 밥을 넣으면서 마음은 전혀 다른 것을 생각하느라 뭘 먹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 드리면서 지금 허락하신 한 끼의 식사를 했는지…

하나의 사소한 행동이지만 그 안에는 많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본질적인 것을 거의 신경쓰지 못하고 외적인 행위에 치중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정말 소중한 행동을 무시하고 쓰레기와 같은 세속의 번지르르한 일을 찾아 다니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임 신부님과 식사를 하셨다구요? 정말 사제직에 대한 존경과 사랑으로 하신 건가요? 아니면 그 주임 신부라는 직분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나름의 세속적 욕구로 하신 건가요? 아니면 당신이 추진하는 사업이 나중에라도 그 주임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은 사업가적 마인드로 만나신 건가요? 모든 외적인 행위 속에는 숨은 의도가 존재하는 법입니다.

우리는 생각만큼 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별력을 잃었고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무엇이 옳은 일이고 무엇이 그분의 마음에 드는 일인지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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