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그가 의도한 배신이 시작되었다는 말이고 마치 기차가 지나가는 것처럼 그 이후의 사건이 줄줄이 도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영광'을 말씀하시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유다의 배신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져오고, 수난은 십자가의 죽음을 이끌어 올 것이며, 죽음은 곧 부활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통해서 사람들이 부활에 대한 믿음을 얻게 될 것이고 그들이 구원받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찬송은 아담의 '복된 탓'을 이야기합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구세주를 얻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죄를 지은 게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우리를 죄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의 무수한 오류 속에서도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재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재앙이 되는 죄의 결과가 있는가 하면 여명이 밝아오기 직전의 어둠과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부활을 상기시켜 주는 도구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부활에 가 닿게 됩니다.
사랑은 오직 부활을 얻은 이들의 전유물입니다. 마치 과자 100봉지를 얻은 아이가 과자 한 조각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과자 한 봉지뿐이라면 과자 한 조각도 아까운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100봉지의 과자 정도면 한 조각 정도는 기쁘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의미의 사랑은 믿는 이들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그 어떤 봉사도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명이라는 과자 하나를 들고 아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이들은 단순히 성당을 빠지지 않고 다니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반면 작은 것 하나라도 내어주고 싶어 애를 쓰는 모습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잘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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