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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게 일어난 일

요셉에게 일어난 일을 구조화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불합리한 상황 - 거룩한 지시 - 믿음의 수락 먼저는 불합리한 상황이 생겨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리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불합리한 일들도 있고 말도 안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어떤 사건이나 사람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신앙'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의 범주 안에서 할 일이면 이미 했기 때문입니다. 요셉 역시도 자신의 능력 안에서는 '파혼'이라는 정상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만 요셉의 좋은 성정대로 그 파혼을 '남 모르게'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요셉이 다루어야 하는 일은 정상적인 범주의 일을 벗어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내면에 믿음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거룩한 지시가 등장합니다. 요셉에게는 그것이 꿈이라는 수단으로 주어졌지만 꿈이라는 수단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상적인 범주에서는 교회나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가르치는 바를 믿어야 하고 영적으로 성숙한 이의 거룩한 명령을 따를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 거룩한 지시를 무시합니다. 그건 오늘날 교회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 거룩한 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코미디언에게 상담을 하면서도 자신의 인생의 근원적인 행방의 문제를 교회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요셉은 마침내 믿음으로 수락합니다. 복음은 이를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표현합니다. 순종, 순명은 대표적인 믿음의 수락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순명' 서약을 하고 수도자들도 장상에게 순명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대인들에게는 적극적으로 거부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은 모두 스스로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순명...

기적과 세속성

기적은 거룩한 신심에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기적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으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모든 이의 내면에 흐르는 것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기적은 '아무에게나' 보란듯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런 모습은 성경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예수님에게 표징을 달라고 떼를 쓰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징 말고는 없을 것이라고 하셨고 반면 제자들은 따로 데리고 가서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신다. 세속화된 세상에 기적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이는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적이 자신을 드러내기를 더욱 조심한다는 말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그 기적을 체험할 만한 신심 속에서 신중함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세상 사람들이 신기한 체험을 떠벌리고 저마다의 세속성으로 난도질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하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다만 함구령을 지켜 나간다. 기적은 우리가 무언가를 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기적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겸손하고 낮추인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비가 와서 낮은 곳으로 흘러들듯이 기적은 그 낮고 겸허한 영혼을 향해 흘러들어가게 될 것이다. 기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을 체험한 이는 말로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그 기적에 대한 응답을 증거한다. 세속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은 '모든 이들'을 고쳐 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믿는 이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믿는 이들의 범위는 당신이 사는 영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영역에 고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이들은 얼마든지 외부에서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영역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예언자는 꼴사나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영역을 넘나듭니다. 그런 가운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 예언자는 자신들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것을 베풀지 않는 사람으로 비춰집니다. 나아가 예언자는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이지 동네의 유지를 따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이 보여주는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 하느님에게서 어긋나는 모습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이 죽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반대로 예언자가 자신들을 죽이러 온 사람처럼 느낍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락하게 해 오던 일들을 예언자가 막아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언자를 죽였고 죽이려 들고 죽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비호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께서 허락한 순간까지, 그 사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자신이 가는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벼랑 직전까지 몰렸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납니다. 저 역시 유사한 경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밀어붙였고 저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사목을 계속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허락하실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까지 묵묵히 제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믿는 이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 파견되었고, 엘리사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파견되었습니다. 믿는 이들에게서 구원의 표지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고 있던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화가 잔뜩 납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목마르신가?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목마르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아주 단순하게 그분의 육체적 필요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만일 그분이 육체적 필요를 뒤쫓아 다니실 것 같았다면 애시당초 십자가 위에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분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고,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반감과 적개심, 살인 의도도 알고 있었습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미리 알고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목마름은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물을 찾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연히 마실 물을 달라고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대화 중에 자꾸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당신이 생수를 주겠노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목마름의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의 갈증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혼을 채우는 물을 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서 달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이 그 물을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영혼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린 결정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갖 기적을 하시는 분이 그저 그에게서 빼앗아 오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목말랐던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자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육체의 식량을 가져오고 여인은 동네 사람들을 이끌고 예수님을 믿게 데려옵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에 목마를까요? 저마다 목마른 것을 찾게 마련이고 그것을 얻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 목마르지 않은 이를 아무리 하느님 앞에 데려다 놓아 본들 그는 결국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뿐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목마른 이는 아무리 멀리 떨어뜨려 놓아도 결국 하느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

바위에서 물이 터져나오다

광야에서 물을 얻을 수 없고, 더군다나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 상식입니다. 모세는 사실 양측에서 말도 안되는 요구를 받았지만 그 말이 안되는 요구 앞에서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더 힘을 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바위를 쳤고 바위에서는 물이 터져 나왔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가능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 또한 불가능입니다. 그러나 순응하는 이는 그 열매를 얻게 됩니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일이 이루어집니다. 본당에 나와보면 여러가지 현실들이 보입니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질 않습니다. 수십년간 쌓여 온 그곳 만의 고유한 어려움들을 해결할 가능성은 0퍼센트에 수렴합니다. 헌데 하느님은 그들에게 물을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바위'에서 뿜어져 나와야 합니다. 그 바위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바위는 물을 꺼낼 수 없습니다. 바위 안에는 내어줄 수분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일이라면 가능합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물은 황당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축이고 그들 앞에 하느님께서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지금의 시대에 사람들은 신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영적인 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야말로 '광야'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목말라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자신의 영적 갈증을 채워 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제들은 바위 같습니다. 더이상 나올 물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조차도 위태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애시당초 하느님 앞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이 직분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에 순명한 이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러면 그 순간 물이, 생명의 물이 그에게서 터져 나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계속 시험할 것입니다. 그분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가를 찾아 다닐 것입니다. 교회는 이 메마른 광야의 시대에서 바위를 쳐서 사람들에게...

제정신이 들다

둘째 아들은 이미 이 순간부터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다만 그의 현실은 아버지의 집 밖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때부터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아버지는 이 순간부터 아들이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부터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을 품고 있었고 그가 다가오기 시작하는 순간에 오히려 그에게 달려갑니다. 그가 제정신이 들기 전에는 그를 붙잡아 본들, 그에게 달려가 본들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떠나는 그를 말리지도 않았고 멀리 있을 때에 방문하지도 않습니다. 제정신이 들기 전의 그에게는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집에서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죽었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문제입니다. 그가 '화를 내고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생각이 아버지의 생각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를 심판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인은 죄인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종처럼' 일하는 자신을 돌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를 타이릅니다. 첫째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 뒤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에게 선물된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행적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그것이 부당하다 생각하며 자신들이 예수님을 보낸 하느님 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회를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건 그들의 몫입니다. 

최후의 시험

보통 시험은 준비기간 동안 잔뜩 준비하고 막상 시험 당일에 시험을 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특히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리의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 평가를 세상의 시험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의 장면은 그 안에 숨어 있는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시험은 마지막에 선한일의 숫자와 악한일의 숫자를 더하고 빼서 최종적으로 결정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셈이고 우리는 그 심판을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개념입니다. 즉 시험 당일에 컨디션이 좋아서 찍기를 잘 해서 성적을 급격히 올릴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 순간 살아가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해 오는 일이 우리의 심판을 결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에 나오는 심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자, 이제 이미 출제된 이 문제를 검토해 봅시다. 작은 이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단순히 돈의 양을 따지고 들거나 생활 수준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작은 이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외된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작은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음의 기준은 여러 면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돈을 필요로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는 당신의 시간을, 당신의 노력을, 당신의 신앙 선포를 필요로 할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친구 가운데에서 여러모로 풍족하나 아직 신앙이 없는 친구가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이 좋은 친구인데 아직 그 누구도 그에게 성당을 가보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신앙이라는 보화를 선물해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나인데 우리는 그를 굶주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급한 양심의 불을 끄기 위해서 가난한 이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주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그...

악마의 가장 기초적인 유혹

그것은 빵을 만들라는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빵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너의 영적인 영역을 희생해서 빵을 얻는 데 힘을 쏟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의 시대에 가장 쉽게 빠지는 유혹 가운데 하나입니다. 악마의 유혹은 뒤로 갈수록 단계를 높여 가는데 사실 우리는 그 첫 단계부터 전혀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입니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풍족하지만 반대로 너무나 영적으로 공허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의 현실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헌데 굉장히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지금보다 못 살 때에는 더한 열심으로 하느님을 찾았으니 말입니다. 지금은 휴가를 가서 귀찮다고 근처 성당을 알아보지도 않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부끄럼 없이 다음주에 와서 주일 미사를 빠졌다고 너무나 쉽게 고해를 합니다. 결국 외부적인 요인이 문제라기 보다 내면의 문제인 것입니다. 현대는 더 많은 이들이 정신적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학교의 현실을 보거나 사회의 현실을 보아도 무언가 건강하지 않은 모습들이 너무나 쉽게 발견됩니다. 이 모든 현실의 첫번째 원인은 빵을 만들려고, 세상의 것들을 위해 영혼의 영역을 희생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까요?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말씀으로 이겨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사실 사람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즉, 돈이 많아서 그 여유를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의지로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는 내면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내면에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가장 힘겨운 환경 속에서도 위대한 일을 이루어냅니다. 반대로 내면의 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갖추어 주더라도 망가뜨리고 맙니다. 사실 악마의 유혹은 이뿐만이 아니라 더욱 교묘하고 영악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어떤 눈이 열리고 어떤 눈이 닫혔나?

아담과 그의 아내는 하느님 앞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걱정이 없었고 맑은 영혼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바로 하느님이 시키는 게 있는데 그걸 그대로 하는 게 맞는가? 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유혹에 먼저 걸려 들었고 이어 남자에게도 그 유혹은 전염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는 열매를 먹고 '눈이 열렸다'고 표현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게 있습니다. 어떤 눈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럼 그들이 전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는 '눈'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린 눈은 세속에 대한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 각자가 하느님과의 유대 없이 각자의 삶을 책임지는 길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목욕을 하면서 우리 몸을 보는데 부끄러움을 느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나 자신의 몸을 쳐다보면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 나아가 하느님의 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죄를 통해서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그리고 각자에게서도 멀어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하고 서로를 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알몸을 가리려는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맑은 영혼은 하느님 앞에 가릴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를 아시고 그도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거침없이 하느님께 열어 보입니다. 그러나 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은 감추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해소 안에서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지켜보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자신의 남은 자존심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사순시기의 첫 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쪼록 고해를 자꾸 뒤로 미루지 말고 사순의 시작에 고해를 보...

착한 것과 착해 보이려는 것의 차이

착한 사람이 있고 착해 보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은 마치 향수병에서 향기가 나오듯이 착함이 자연스럽게 묻어 나옵니다. 내면이 근본 선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선에서 기인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 착해 보이려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이 근본 착하지 않기 때문에 착해 보이는 외적 요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흔히 착한 일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애를 써서 억지로 집어 넣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자신의 내면 속에 착함이 머무를 공간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그런 일을 하려고 해도 착함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도 됩니다. 비가 올 때 물이 고이는 곳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낮은 곳입니다. 높은 곳에는 물이 고이지 않습니다. 억지로 물을 모아다가 높은 곳에 쏟아내면 자연스럽게 그 물은 낮은 곳으로 찾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비처럼 내리는 것입니다. 그걸 억지로 끌어모아 누군가에게 쏟아붓는다고 그것이 그에게 모두 전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낮게 만들지 않는 이상 드높아진 영역에는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르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이 한 활동을 착하지 않은 사람이 따라 한다고 착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착한 내면을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뒤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함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오게 됩니다. 우리가 착해지는 그 첫번째 여정은 바로 화답송에 나오는 것처럼 진정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부숴뜨릴 때에 비로오 선의 시작을 마련하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치는 순간부터 은총은 알아서 길을 찾아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

어제 한 젊은 친구가 물었습니다. "하느님이 전지전능하시다면 우리의 앞길도 다 알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대답해 주었습니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하느님은 우리의 앞길을 모두 알고 계셔.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져 있어. 선택을 하고 난 이후에 그 여정이 어디로 가 닿을지 하느님은 아시지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어. 그렇지 않다면 하느님이 왜 우리를 구원하고자 애를 쓰시겠니? 만약에 우리에게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일이 다 결정되어 있는 거라면 하느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보낼 필요도 없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면 될텐데 말야. 그래서 우리에게는 선택이 열려있어." 그래서 오늘 1독서 안에는 그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밝혀 줍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힘 있는 자들의 배척을 당하는 길이고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정반대의 길이 좋다고 세뇌를 시킵니다. 십자가는 최대한 버리고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하여 살아가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은 정반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을 걸어야 하고 우리 스스로를 버리고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우리에게 길을 바꾸라고, 다른 표현으로 회개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지는 지상의 어느 지점이 아니라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 선포의 가장 기초적인 메시지는 복음 환호송에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영혼의 주머니

구멍난 바지 주머니에 사탕을 넣고 다니는 친구는 멍청한 친구입니다. 그 구멍으로 사탕이 줄줄 새어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혼에도 구멍이 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중에 몇 가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 보이기 위한 선행 우리가 선행을 하고 나서는 곧잘 그 선행을 광고하고 다니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영혼에 구멍을 내게 되는 셈입니다. 우리의 그 허영이 영혼에 구멍을 내고 나면 선행을 통해서 내가 얻게 된 좋은 것들이 영혼에 머무르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 버립니다. 심한 경우에는 그 허영의 구멍으로 들어와서는 안될 것도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유혹에 너무나도 쉽게 빠져듭니다. 자신이 한 작은 선한 일이 충분히 자신의 좋은 습관으로 굳어지기도 전에 그것을 모조리 다 까발려 버립니다. 결국 그가 한 선행은 온데간데 없고 그는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얻고자 한 것 뿐입니다. 2. 드러내는 기도 기도를 하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보는 것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들이 보란듯이 의도적으로 공공연히 자신의 신심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또한 영혼에 구멍을 뚫고는 그 영혼에 성스러움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시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사탄이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그의 허영을 채워줄 다른 요소들로 그들을 이끌어갑니다. 이런 이들은 곧잘 자신이 성녀라도 되는 듯이 나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스러움을 알리고자 애를 쓰고 곧잘 예언자의 흉내를 내어서 사람들을 꼬시려고 애를 씁니다. 사실 이런 이들은 거룩한 이들이 아니라 고약한 이들입니다. 영적으로 굉장히 교만하고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헌데 성당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헷갈려 합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성당에서 추구해야 할 거룩한 행동을 너무나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식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들이 요란한 깡통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립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기도하는 이에게서 보이는 평화와 기쁨이 ...

주도권 다툼

다툼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사실 그건 우리 사람쪽에서 바라보는 관점일 뿐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전해지는 바는 주도권이 전적으로 하느님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2독서는 이 점을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무엇이라도 되는 양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도권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우리의 능력과 가능성을 넓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소유한 것을 확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움직임은 돈에 대한 추구로 모여들게 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이 그 돈을 뒤쫓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성당에 좋은 신앙 강좌가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 광고 문구를 '서울에서 회당 백만원씩 하는 강좌를 이곳에서 무료로 전해 드립니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가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실제로 오는 사람마다 10만원씩만 주더라도 사람들은 좋다고 모여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쥐어 보려고 아둥바둥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 우리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멀리 도망가려고 하면 할 수록 죽음은 더울 우리를 치열하게 뒤쫓아오고 결국 하나씩 둘씩 세상에서 사라져 갑니다. 부자도 가난한 자도 잘난 이도 못난 이도 모두 죽음을 이겨내지는 못합니다. 그런 가운데 신앙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길을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바로 하느님의 주도권에 우리를 넘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어떻게든 늘려 보려는 수명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전혀 다른 생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전혀 다른 생명, 주님은 그것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

자기 일에만 골몰하는 부자들

성경이 말하는 부자에 대한 관점은 바로 그 부로 인해서 비천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세상의 추이와 비교하자면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부자가 되도록 하고 많이 벌고 많이 쓰기를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소유할 때에 단순히 그것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우리는 마음을 담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공기를 소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어디에나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유함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동시에 그것에서 분리될 때의 고통을 예비하기도 합니다. 예컨데 버스를 타는 사람은 버스 자체에 애착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동 수단으로서의 필요에 의해서 그것을 이용할 뿐입니다. 하지만 내 차를 소유한 사람은 그때부터 그 차가 어디 긁히진 않는지 마음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부유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영혼의 능력의 상당 부분을 거기에 투자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냥 의미없이 지니고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지닌 부에 골몰하기 시작합니다. 헌데 우리에게는 한정된 자원이 있습니다. 그건 우리의 삶이라는 소중한 자원, 우리의 시간이라는 소중한 자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세상의 물질에 골몰하는 동안 그 시간들이 소진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제서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쓸데없는 것에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허비했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심지어 영적인 것도 '소유'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복음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어떤 것, 나의 경험 목록에 집어넣을 대상이 되고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체험을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자들의 영적 탐욕을 알아 차리시고 그들에...

복잡한 신앙?

언뜻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내용이 복합적으로 들어 있고 다채로운 주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새방골 성당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서 출발하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떤 수단으로 본당에 오려느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차를 타고 오는 사람에게는 새방골로 오는 주요 도로를 가르쳐 주거나 네비에 찍을 주소를 가르쳐 주면 됩니다. 반면 버스를 타고 오려는 사람에게는 어떤 노선이 있고 내리는 정류장 이름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와룡산을 등산하고 있어서 와룡산 정상에서 새방골로 오는 길을 가르쳐 주려 한다면 전혀 엉뚱한 방향과 엉뚱한 길을 알려 주어야 마땅합니다. 이렇게 길과 방법은 정말 다양하지만 하나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새방골을 찾아오는 법'이라는 핵심입니다. 오늘 복음은 언뜻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이 표현은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생명을 찾는 법,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법, 구원을 얻는 법, 참된 행복을 찾는 법 등등입니다. 그런 가운데 '율법'이라는 것이 등장합니다. 사실 모든 율법은 그 근본 목적 속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핵심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외적으로는 엄청 다양하고 수가 많고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핵심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의 모든 계명들을 외우고 하나도 빠짐없이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개념이 아니라 율법이 근원적으로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나 가톨릭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 여전히 올바른 이해를 힘들어합니다. 우리는 지금의 시대에도 언뜻 '지켜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죄를 없애려는 사회

현대는 '죄'라는 것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사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서 적지 않은 부담을 가지는 것도 바로 이 '죄'리는 주제 때문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가톨릭은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다른 종교에 있던 사람들이 다가오는 데에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죄라는 것이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건 사회의 문제이고, 환경의 문제이고, 심리의 문제이기에 결국 그 어떤 죄도 전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는 성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납니다. 특히나 심리라는 것은 잘못 사용하게 되면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영향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는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수단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내 탓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짚어줍니다. 그건 바로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을 부여받은 이들입니다. 그 영역이 바로 우리의 영혼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자유가 있고 우리는 그 영혼의 자유를 바탕으로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주어지게 됩니다. 행복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이고, 생명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반대로 불행한 이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이들이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이 근본 방향은 절대로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간절히 바라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담배를 권하고 담배 피우는 것을 찬양하는 것처럼 악에 물든 사람들은 악의 방향을 좋은 것으로 꾸밀 뿐입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죽음이 생명을 이겨본 적은 없고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것에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합니다. 사실 이 방향을 올바로 아는 것을 두고 성경은 '지혜'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영리함은 사실 성경적 지혜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저 시험을 잘 치르고 ...

기적을 찾는 군중들

군중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은 호기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그리고 호기심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고 악한 일에도 호기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악한 일에 더 호기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널리 퍼뜨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군중의 시선은 예수님의 모습에서 저마다 자신들이 가진 어둠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이야기거리를 얻을 것이고 그것을 퍼뜨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려는 일은 더 많은 장애물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군중에게서 떼어 내십니다. 그 사악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군중에게서 떼어놓고 나서야 비로소 '치유'를 선물합니다. 또한 치유 직후에도 그들에게 제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하지만 그들, 소위 군중들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언뜻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듯이 읽혀지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마땅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신앙에 조금 눈을 뜨고 맛을 본 사람들은 흔히 신앙의 기적들을 신기해 하고 그것들을 찾아다니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에게 기적은 선물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호기심'에 가득차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은 로또복권처럼 오는 게 아닙니다. 기적은 하느님을 성실히 사랑하는 이에게 부어지는 선물과 같은 것입니다. 기적의 기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꾸준하고 성실하게 사랑하는 것이 기적을 불러오게 마련입니다. 마치 향기 나는 곳에 벌들이 모여들듯이 참된 신심을 내면에 간직한 이에게 기적이 찾아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기적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오히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갈망을 가진 이에게 주님은 '에파타'하고 영적 눈이 뜨이고 영적 귀가 열리는 기적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의미

  바로 어제 독서에서 솔로몬은 스바 여왕의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그것이 모두 무너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은 언제라도 자신의 여정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악인의 삶도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솔로몬의 일련의 행위들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올바로 성찰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교회가 근원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에게 참된 제사를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이 제사는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존재의 태도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외적으로는 '제사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우상'을 많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우상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데 비록 모양새는 저마다 다 다를지 몰라도 내용은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하느님에게 대조되는 것으로 인간의 욕구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시나이산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간적 욕구를 대변하는 금송아지상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우상은 인간이 자신의 욕구를 반영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그것이 꼭 외적으로 형태를 지니고 표현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가리키는 방향이 아닌 방향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은 우상이 됩니다. 언뜻 우리 성당은 순례지에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성당을 왔다 가면 '성지순례'를 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예쁜 등나무 소문을 듣고 그 사진을 찍으러 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스탬프'가 있다는 소식에 와서 도장을 찍고 가기도 합니다. 본디 성지 순례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여정으로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을 내려놓고 거룩한 곳을 통해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것을 보다 잘 배우기 위해서 실행하는 고된 여정이라 '순례'라고 ...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들

오늘 복음에는 다양한 부덕함들이 등장합니다.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그것들입니다. 언뜻 이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다 배워 두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하나하나의 어두움들을 모조리 파고들어서 그 특성과 주의해야 할 점들을 아는 것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의 근원이 모두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악'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악은 어두워진 영혼의 결과물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재미난 게 내면의 영역을 감출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감추어도 결국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의 행실은 결국 내면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올바로 식별하면 그 사람의 내면에 든 것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도 선의 가치 일부를 지닐 수 있고, 반대로 선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도 때로는 쓰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식별자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결국 그의 주된 성향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물고기가 어쩌다 물 밖으로 뛰어오를 수는 있어도 결국 그가 숨을 쉬어야 하는 것은 물 속입니다. 반대로 원숭이도 어쩌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댈 수는 있지만 물 속에 있는 것이 그의 본질은 아닙니다. 다른 한 편 재미난 부분은 사람의 내면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둠의 사람을 앞에 두고 그가 변화될 때까지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에 물든 세상에 십자가라는 빛을 비춰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때 주의할 점은 우리의 능력치를 올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 자신조차 악의 유혹에 쉽사리 시달리는 사람이 강한 어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빛으로 이끌겠...

치유는 오늘날에도 가능한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치 '만병통치약'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가오는 병자마다 손만 대어도 낫게 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하지만 사실 세상의 창조주이신 분에게 육체적인 병을 치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하고자 하신다면 새로운 몸을 만들어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치유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 메세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우리의 구원자로 다가오신 분은 당신의 치유를 통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유형의 치유를 더이상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간혹 자신을 스스로 '치유자'라고 내세우는 사람이 몇몇 있기는 하지만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실제로 검증에 들어갔을 때에 정말 예수님처럼 치유하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을 해서 병증의 이유도 알고 그 해결책이 나와 있는 병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의 힘을 빌어 치유를 찾는 이가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사실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아프면 병원을 가지 누가 사제를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치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육체의 문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심리'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치유는 영혼의 영역에 속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악에 손상을 입고 부도덕함에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여전히 구원자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사제의 안수를 필요로 합니다. 믿음으로 다가오는 이들에게 오늘날에도 사제의 치유 권한은 여전히 작동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영혼의 영역에 큰 관심이 없고 따라서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지도 못하며 사제에게 영적인 치유를 위해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고해소는 텅 비어 가고 있고 평일미사의 은총에 목말라 하는 이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들 저마다 믿는 대로 되길 바랍니다. 마을이든 고을이...

경계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

지옥은 싫은데 딱히 천국을 원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에게 멀어지면 안될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착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런 이들에게 딱 좋은 것은 바로 율법, 법규,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선을 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최소를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것만 지키는 신앙인... 하지만 사랑을 향해 나아가거나 더 이상의 배움을 거부하는 신앙인. 오늘날 주변에서 자주 발견하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언뜻 그들은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그들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쟁기를 잡고 밭으로 가면서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들입니다. 묵시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6)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이들입니다. 아이를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사람은 아이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저 아이의 부모가 몇 시에 밥을 먹이고 몇 시에 재우라는 지침을 주었다고 해서 다른 건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그 시간에 아이가 빽빽 우는데도 입에 밥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아이가 제 시간에 잠들지 않는다고 감기약을 먹여서 재운다면 그건 아이를 돌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잘못하다가는 아이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도 규정만 지키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정해진 시간에 할 일을 하고 겉으로 좋아 보이는 신앙 활동을 하고 있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또한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피하기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

신앙인의 맛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신앙인의 맛은 복음에 바로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착하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에 착함을 오해합니다. 착함을 그저 무슨 짓을 하든지 다 받아들이기만 하는 태도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착함은 순박함, 부드러움, 온유함만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착함은 영혼의 올바른 방향을 의미합니다. 휴대폰을 가지고 밤새도록 놀겠다는 아이에게 그저 세상이 말하는 것처럼 '착하기만' 한 엄마는 사실 착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아이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방임이고 그것은 사실 착한 게 아니라 나쁜 것입니다. 착한 엄마는 그 아이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그런 조치가 설령 아이의 미움을 사더라도 그것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착한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착한 신부는 그저 될 대로 대라고 내버려두는 신부가 아닙니다. 일이 올바로 진행되도록 신경쓰고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중에 설령 신자들의 반감을 사더라도 감내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착함은 그저 '부드러움'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향과 그 방향을 굳게 지키려는 용기와 강직함도 들어 있습니다. 나아가 세속적인 요소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과 천진함, 그리고 약한 이들을 보호하고 바른 것을 지키려는 정의로움도 들어 있습니다. 결국 착함은 특정한 외적 성향 하나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하고 저 나름대로의 하느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착한 하느님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조작하는 대로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고 우리를 초월해 계신 분이시고 무엇보다도 온 우주를 선으로 움직이는 분이십니다. 훗날 우리는 그런 분 앞...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곳에 기꺼이 투자합니다. 나에게 무언가 득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은 그 이득을 '자본'으로 표현하고 그래서 사기꾼들이 득세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겠다는 곳에 사람들은 모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리고 남은 생을 한탄하며 살거나 심할 때에는 목숨까지 내다버리곤 합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이 진정한 이득인지를 가르쳐 주려고 애를 씁니다. 이사야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여기서 잠깐 검토해 봅시다. 위의 모든 것은 나의 고유한 것을 빼앗기는 행위가 아닙니까? 내 양식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 내 공간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옷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 내 시간과 노력을 다른 이에게 내어주는 것은 모두 나에게 존재하는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에 '얻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다음 구절에 설명됩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우리가 나의 것으로 부족한 이들을 채워 줄 때에 그것은 손해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빛을 증가시키고, 나의 영혼의 상처를 아물게 하며, 의로움이 나의 길을 이끌게 되고, 주님의 영광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가장 큰 이득은 우리가 부르실 때에 응답해 주시는 하느님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함몰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자신이 소유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

어디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우리가 어떤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떤 이들은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도 없습니다. 그는 꿈꾸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설령 자신에게서 완성되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을 지니고 거룩한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은 꿈꾸는 사람들이고 성실하고 책임감있게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헤로데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부와 권위도 그의 어두운 마음 앞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는 강박적으로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옭아매고 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부터 죄가 심각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마치 미끄러운 내리막처럼 죄는 서서히 한 사람을 더 큰 어둠으로, 더 큰 어둠으로 서서히 내려가게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죄악을 심심찮게 저지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헤로데는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을 죽일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할 기회,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싶은 기회를 노렸을 뿐이고, 헤로디아라는 악녀는 그의 허영과 교만을 이용해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되었고 남은 평생을 그 죄책에 시달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갈까요? 거룩한 희망일까요? 아니면 갈수록 깊어지는 죄악의 어둠일까요? 깊이 묵상하고 회개하고 어둠에서 빠져나와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입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쉬운 신앙생활?

다윗은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그리고는 그 내용을 이렇게 서술합니다.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왜냐하면 하느님의 명령을 지키고 그분의 길을 걷고 그분이 가르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우리는 쉬운 길을 걷고자 신앙생활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쉽게 느껴지다가도 나중에는 어려워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성실하고 꾸준하게 지킨다는 것은 이 세상이 가르치고 이끄는 방향에 꾸준히 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쉬운 게 아닙니다. 복음에서도 같은 상황이 묘사됩니다. 우리는 감상젖은 복음 선포를 꿈꿉니다. 마치 영화 미션에 나오듯이 가운데 앉아서 악기 하나만 불면 자동으로 사람들이 다가와서 신자가 되는 식입니다. 그러나 실제 선교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영화처럼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교는 싫다는 사람에게 다가서다가 거절도 당하는 법이고 아무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싫다는 이유로 욕을 먹기도 합니다. 부모가 가진 신앙을 자녀들에게 전해주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 수중에 있을 때나 아이들이지 철들고 나면 모두 도망가 버립니다. 본당에서 신자들을 사목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만 마음 상하는 일이 있거나 기분나쁜 일이 생기면 돌아서서 뒷담화 하는 것을 우습게 아는 세상에서 사제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히 일어날 일을 바탕으로 여지를 남겨 두십니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우...

행복의 다른 기준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에게 규정하는 기준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나 '행복해지는 방법'은 따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도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아닌 세상 안에서 성공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들 그걸 추구합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고 이뻐지고 싶어하고 유명해지고 싶어하고 권력을 쥐고 싶어합니다. 그게 행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존엄'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더욱더 메말라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행복의 기준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딴세상 말씀 같습니다. 가난한데 어찌 행복할 것이며 슬퍼하는데 어찌 행복할 것입니까? 만일 누군가가 인스타그램에 후줄근한 옷을 입고 맨날 펑펑 우는 모습을 올리면 아무도 쳐다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정말 말도 안되는 구절이 등장하기까지 합니다. 박해를 받으면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우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우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우리는 행복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믿겠습니까? 아예 듣기조차 거북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멈춰서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행복이 정말 행복이 맞는 걸까? 혹시 예수님의 가르침 안에 진리가 있지는 않을까? 바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뉘게 됩니다. 그저 '신앙'이라는 껍데기를 쓰고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는 것을 정말 보기를 원하고 배우기를 원해야 비로소 신자가 됩니다. 그저 성당을 다닌다고 미사 때에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다고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을 갈망하고 그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에 신자, 즉 믿는 사람이 되는 것입...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

우리는 가난을 싫어합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표현들을 듣고 있자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성경은 우리더러 가난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고 가련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유하고 힘있는 사람, 남들이 무시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과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그저 돈이 없는 가난을 말하고 처참한 몰골의 가련함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에 피신한다'라는 개념입니다.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이 있는데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 이들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특성이 앞서 서술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는 이들이고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겸손한 이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백성의 가난함과 가련함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은총이 부족해서 가난함을 느끼고 하느님 앞에서 지극히 낮은 존재로서 살아가기에 가련한 이들입니다. 설령 그들이 세상의 모든 부를 쥐고 있더라도 그들은 하느님이 없이는 가난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들이 세상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어도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기자신을 느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가난과 가련함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질적인 부가 있거나 없거나 그것은 사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상황 안에서도 주님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가 있다면 그 부를 가지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고 없으면 없는대로 딱히 욕심내지 않고 필요한 것을 찾으며 만족하고 살 수 있는 이들입니다. 또한 그들의 가련함은 그저 자신을 낮추기만 하는 가련함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련함은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이기 때문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실행합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오히려 그...

예수님의 첫 선포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예수님이 처음으로 선포하신 내용입니다. 그것은 죄에서 돌아서라는 회개의 메세지이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올바른 목적지를 선포하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입니다. 신앙생활은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유익을 가져오는 것일까요? 만일 신앙 안에서 우리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한다면 그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이건 마치 수영장에 가서 등산을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신앙이라는 것, 즉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보이는 대상을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확인하면 그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약속된 것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그 신앙의 대상에 목마른 자들에게 선포됩니다. 신앙은 죄에 억눌려 본 이들, 세상의 어두움에 시달려 본 이들에게 선물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세상 안의 어떤 대상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영원으로부터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메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이고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가득 찬 방을 치우지도 않고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는 손님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그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과제는 ‘회개’가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비워져야 합니다. 우리 안에 탐욕과 이기심, 시기심과 증오, 원한과 분노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로 빛이신 하느님을 맞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우리가 길을 나서면 방향을 올바로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 번째 과제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길을 나서면서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나서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차를 운전한다면서 목적지도 정해놓지 않고 나서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올바른 목적지를 뚜렷이 하고 시...

어둠과 빛

어떤 것을 어둠으로 느끼느냐 하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누군가는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빛으로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어둠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반대로 누군가는 미사를 싫고 귀찮고 어려운 어둠처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미사를 우리의 영혼을 밝히는 빛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밝혀 주시려는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빛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둠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신앙생활 안에서조차 엉뚱한 빛을 찾아다닙니다. 그들은 신앙이 자신의 현세의 안정을 보장해주고 병고를 치유해주고 곤란을 덜어주기를 바랍니다. 물론 하느님에게는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성경 안에서도 예수님은 수많은 이들의 곤란함을 덜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것 자체가 빛은 아닙니다. 그런 실마리는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 주시면서 예수님은 마지막에 당신에게 감사를 드리러 돌아온 이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즉, 병고의 치유와 구원의 선포가 분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병을 치유받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해 주시려는 빛은 영혼을 밝히는 빛이고 영원에 가 닿는 빛입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것들이 어둠과 암흑을 형성합니다. 지금 현대의 한국 사회는 외적으로 어마어마한 부흥을 겪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암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올바른 훈육을 상실해 버렸고 내면의 여러가지 가치와 덕들을 더는 추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욕구는 그 즉시 채워져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에 불행하다고 생각하면서 한탄을 하고 불만을 가지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십자가야말로 우리에게 선물된 빛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어둠을 벗어버리는 훈련을 하고 나아가서 참된 빛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빛이 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던 것을 얻는 이들은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십자가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