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사는 ‘동남아’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어떤 느낌이십니까? 반면 우리 나라에 사는 ‘미국, 유럽’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이번에는 어떤 느낌이십니까? 두 대상에 대한 느낌이 완전히 동일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동남아라는 표현 자체에 대해서 낮고 미천하고 가난하고 모자란 느낌을 받고, 미국, 유럽에 대해서는 진보된 느낌, 부유하고 화려한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그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가난한 나라에서 만난 이들은 배우지 못한 탓에 교양이 없고 기본적인 국제적인 사회 상식에서 많이 뒤처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아예 시작부터 그에 대해서 접하지 못하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오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릴 때부터 잘못을 하면 무조건 매로 다스려졌는데 어떻게 대화와 이성을 쓰는 것이 활성화 될 수 있겠습니까? 별다른 낙이나 여가활동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성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사정은 단순히 그 결과로만 취급되어서 선진국의 사람들에게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낮춰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우리가 ‘동남아’에 대해서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부유한 나라에서 만난 이들은 ‘교양’이 있습니다. 사제에게 커피를 한 잔 내어도 컵받침을 받쳐서 내어놓고 음식도 멋진 사기 그릇에 내어놓지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실제 사는 모습을 관찰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일종의 ‘한계점’을 드러냅니다. 여기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는 무언가가 있지요.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사회적인 통념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지 활동에는 얼마든지 참여를 하지만 그 이상의 자신의 몫이 침해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민감해집니다. 사회복지비가 정해져 있으면 그것은 지불하고, 식당에 팁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은 인정을 하고 내지만 순전히 자신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는 참으로 인색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희 동네 사람들은 옆집 사람이 상을 당하면 자신의 일상 직업을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본 생활과 그것을 보조하는 수단을 모두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것을 침해하는 것을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경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교양으로 포장하고 아주 고급스럽고 좋은 것으로 광고를 하지요.
사람이 선하고 악하고 하는 것은 그가 교양이 있는가 없는가 만으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선하고 교양이 있으면 좋겠지만, 교양은 충분히 있으나 악한 사람도 존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에게 더 헌신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동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조금은 차가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법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지닌 재물을 의존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부유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얼마만한 ‘형제애’를 느끼는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의 열손가락입니다. 새끼 손가락이 아픈데 엄지에다가 반지를 찾아 끼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제가 직접 만나본 그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먼저 가난한 나라에서 만난 이들은 배우지 못한 탓에 교양이 없고 기본적인 국제적인 사회 상식에서 많이 뒤처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악해서가 아니라 아예 시작부터 그에 대해서 접하지 못하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입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오지 못했는데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해서 올바로 알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릴 때부터 잘못을 하면 무조건 매로 다스려졌는데 어떻게 대화와 이성을 쓰는 것이 활성화 될 수 있겠습니까? 별다른 낙이나 여가활동을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성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모든 사정은 단순히 그 결과로만 취급되어서 선진국의 사람들에게 비난받기 일쑤입니다.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못 사는 나라의 사람들을 기본적으로 낮춰 보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우리가 ‘동남아’에 대해서 편협한 시각을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부유한 나라에서 만난 이들은 ‘교양’이 있습니다. 사제에게 커피를 한 잔 내어도 컵받침을 받쳐서 내어놓고 음식도 멋진 사기 그릇에 내어놓지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사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실제 사는 모습을 관찰할 기회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일종의 ‘한계점’을 드러냅니다. 여기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은 안된다는 무언가가 있지요. 훌륭한 교육을 받은 그들은 사회적인 통념 안에서 이루어지는 복지 활동에는 얼마든지 참여를 하지만 그 이상의 자신의 몫이 침해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민감해집니다. 사회복지비가 정해져 있으면 그것은 지불하고, 식당에 팁이 정해져 있으면 그것은 인정을 하고 내지만 순전히 자신의 선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는 참으로 인색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희 동네 사람들은 옆집 사람이 상을 당하면 자신의 일상 직업을 희생하면서도 그들을 위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본 생활과 그것을 보조하는 수단을 모두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다가와서 그것을 침해하는 것을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경계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는 사회적인 활동을 교양으로 포장하고 아주 고급스럽고 좋은 것으로 광고를 하지요.
사람이 선하고 악하고 하는 것은 그가 교양이 있는가 없는가 만으로 분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선하고 교양이 있으면 좋겠지만, 교양은 충분히 있으나 악한 사람도 존재합니다.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에 하느님에게 더 헌신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서로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동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조금은 차가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은 법 안에서 살아가며 자신이 지닌 재물을 의존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부유한 사람일까요 아닐까요? 그것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얼마만한 ‘형제애’를 느끼는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갈라놓으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당신의 열손가락입니다. 새끼 손가락이 아픈데 엄지에다가 반지를 찾아 끼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