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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영성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을 배우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과 ‘수정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는 그 언어를 실제로 활용하는 환경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 환경에 들어가지 않고 책으로만 배우는 상황에서 배우는 언어는 한계가 있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결국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배우는 것인데 책으로만 배우는 언어는 실제적인 상황에서 필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 머릿속으로 끊임없는 계산을 하기 때문에 대응속도가 늦어지는 것입니다. 말은 직접적인 상황 속에 뛰어들어가서 즉각적인 대응을 하면서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 필요하기에 말을 배우는 데에 필요한 첫번째 요소는 ‘그 언어를 실제적으로 사용하는 환경’일 것입니다.

두번째로 중요한 요소는 ‘수정의 가능성’입니다. 아무리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 들어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말을 수정할 가능성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은 같은 실수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릇된 표현을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보다 말을 빨리 배우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누구나 그 말을 수정해주기 때문이지요. 반면 어른은 그 사회적 지위 때문에 함부로 다가가서 그런 소소한 수정을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성격이 굉장히 닫혀 있는 사람이라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같은 선교지에 와서 같은 햇수를 살더라도 서로 다른 수준의 언어 영역에 머무르는 것은 바로 이 두번째 이유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존감이 지나치게 강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타인의 도움을 전혀 구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언어적 오류를 수정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것이지요.

이와 같은 것을 영적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진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영적인 환경에 처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안에 젖어 살면서 영적인 것을 ‘지식적으로’ 접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것 역시도 마치 ‘언어’처럼 구체적으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필요한 곳에 인내를 써야 하고, 관용이 필요한 곳에 관용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련’이 필요한 것이지요. 시련이 없으면 우리의 영성은 자라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춰진 곳에서는 인내, 용서, 사랑 같은 것을 실천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수정의 가능성’이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의 내면에도 그릇된 부분, 약한 부분이 늘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수정할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모두 바라보는 나의 약점을 나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같은 오류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겸손’이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는 겸손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결과를 들려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그들의 표현 속에서 나 자신을 보다 더 잘 살필 수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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