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을 할 거리를 준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으로 분별하지는 않습니다. 먼저는 의심하게 마련이지요. 누군가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 되기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의외로 굉장히 쉬울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아 버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 진행과정에 대해서 잘 압니다. 우리가 그 드라마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본 소식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식품 영양학 박사가 한 식재료 소개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 식재료의 성분을 완전히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박사’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 말을 기억하지요.
헌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신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실성의 여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 기사니까 당연히 받아들여야지’라고 생각하거나 ‘박사니까 믿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가 진짜 박사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저 화면 아래에 작은 타이틀에 그렇게만 적어주면 그대로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끼리 영광을 주고받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말들을 믿어줍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의 말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로 신뢰해야 할 말은 창조주에게서 나온 말이고, 그분의 외아들의 말이며, 그분의 성령의 말이어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인간의 권위’를 신뢰하면서 정반대로 하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실성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임을 당할 만한 죄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 적어도 착한 분이셨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헌데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분이 왜 그렇게 되셨는지 가르치지만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람들은 이해가 정지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분이 정말 사랑으로 돌아가신건지, 그 사랑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성당은 왜 나가는 건지, 선한 일을 해서 도무지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건지, 지상 생활도 바빠 죽겠는데 영원한 생명을 왜 찾으라는 건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심 많은 종족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지나왔으면서도 곧잘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죽을 고생을 할 때에는 하느님을 부르짖다가 나으면 금세 헤헤 거리면서 제 하고 싶은 짓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분별력이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반쯤 멍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대부분은 ‘돈, 명예, 권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치 배고픈 강아지가 잘 구워진 소세지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에 달려드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의 굶주린 정신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잃고 영혼을 잃고 결국 지상의 생명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분별할 거리는 많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행적과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로 다가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경을 읽는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신뢰하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아 버리지요.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 진행과정에 대해서 잘 압니다. 우리가 그 드라마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드라마에 대해서 할 말이 많습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본 소식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에 남게 됩니다. 어느 프로그램에서 식품 영양학 박사가 한 식재료 소개도 잊지 않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그 식재료의 성분을 완전히 다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박사’이기 때문에 그를 믿고 그 말을 기억하지요.
헌데 우리는 그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신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실성의 여부에 대해서 우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문 기사니까 당연히 받아들여야지’라고 생각하거나 ‘박사니까 믿어야지’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그가 진짜 박사인지 아닌지도 모릅니다. 그저 화면 아래에 작은 타이틀에 그렇게만 적어주면 그대로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끼리 영광을 주고받고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말들을 믿어줍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자의 말을 믿기 힘들어합니다.
우리가 신뢰해야 할 대상은 세상의 무언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로 신뢰해야 할 말은 창조주에게서 나온 말이고, 그분의 외아들의 말이며, 그분의 성령의 말이어야 합니다. 헌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인간의 권위’를 신뢰하면서 정반대로 하늘의 권위를 의심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진실성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죽임을 당할 만한 죄가 특별히 없었다는 것, 적어도 착한 분이셨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헌데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은 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분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분이 왜 그렇게 되셨는지 가르치지만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람들은 이해가 정지되는 듯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분이 정말 사랑으로 돌아가신건지, 그 사랑이 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먹고 살기 바빠 죽겠는데 성당은 왜 나가는 건지, 선한 일을 해서 도무지 나에게 무슨 득이 되는건지, 지상 생활도 바빠 죽겠는데 영원한 생명을 왜 찾으라는 건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의심 많은 종족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하고 홍해를 지나왔으면서도 곧잘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이 우리 인간이고, 죽을 고생을 할 때에는 하느님을 부르짖다가 나으면 금세 헤헤 거리면서 제 하고 싶은 짓을 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에게는 훌륭한 분별력이 있지만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은 반쯤 멍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의 대부분은 ‘돈, 명예, 권력’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마치 배고픈 강아지가 잘 구워진 소세지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것에 달려드는 것과 비슷하게 우리의 굶주린 정신은 세상의 유혹 앞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게 우리는 마음을 잃고 영혼을 잃고 결국 지상의 생명 마저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분별할 거리는 많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행적과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에로 다가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성경을 읽는 가톨릭 신자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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