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고, 다만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상에게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불륜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를 멀리하라고 해야 합니다. (사도 15,19-20)
모든 문화는 동일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니 종교나 내 종교나 모두 똑같고 결국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고 하면서 마치 아무런 차이도 없는 듯이 처신하려는 포용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사도들의 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올바른 분별이 필요합니다. 포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던 것은 그 문화권 안에서 적용되는 것이니 다른 민족들에게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되지만 우상에게로 이끌릴 위험이 있는 것과 불륜, 부당한 방법으로 살해된 짐승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들은 당시의 문화 안에서 분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첫 회의, 즉 공의회였던 셈입니다. 이처럼 공의회라는 것은 당시의 현 실태에 맞게끔 교회가 적응해 나가는 일종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에는 우상에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반면 불륜에 관해서는 여전히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전에 없던 여러가지 예를 들어 인터넷과 여러가지 전자기기들의 윤리성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 내면과 외적 환경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과거의 관습은 오늘날 더는 통용되지 않고, 과거의 기본 상식은 오늘날에는 이상한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서서히 변화되고 진보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불교의 선과 진리를 향한 추구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들의 모든 교리가 우리에게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가 됩니다. 불교 문화 안에서 자라나 훌륭한 불교 신자가 된 이들을 하느님은 내치지 않으시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기회가 된다면 차분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에게 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이를 잘못 이해한 일부 막나가는 종파들이 불상을 부수고 성모상을 무너뜨리는 식의 엉뚱한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치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지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진리의 빛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는 길에 있어서 서로 진심어린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학적 토론이 아니라 이해와 포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며 단순히 ‘말잔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학식이 높은 신학자라지만 가난한 이웃을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보다는 불자이면서도 자비심으로 주변의 이웃을 진실한 마음으로 돌보는 이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더 아름다워 보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남쪽 여왕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멀리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은 오직 별빛 하나에 의존해서 그 머나먼 길을 걸어 왔습니다. 세상 안에는 참된 진리의 빛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고 안심하고 있다가는 꼴찌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모든 문화는 동일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니 종교나 내 종교나 모두 똑같고 결국 진리는 하나로 통한다고 하면서 마치 아무런 차이도 없는 듯이 처신하려는 포용주의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사도들의 모범에서 알 수 있듯이 올바른 분별이 필요합니다. 포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것들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던 것은 그 문화권 안에서 적용되는 것이니 다른 민족들에게 어려움을 주어서는 안되지만 우상에게로 이끌릴 위험이 있는 것과 불륜, 부당한 방법으로 살해된 짐승은 피해야 한다는 것을 사도들은 당시의 문화 안에서 분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첫 회의, 즉 공의회였던 셈입니다. 이처럼 공의회라는 것은 당시의 현 실태에 맞게끔 교회가 적응해 나가는 일종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오늘날에는 우상에 바쳐 더러워진 음식과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피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반면 불륜에 관해서는 여전히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밖에도 전에 없던 여러가지 예를 들어 인터넷과 여러가지 전자기기들의 윤리성과 같은 것에 대해서도 언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은 고정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그 내면과 외적 환경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중에 있습니다. 과거의 관습은 오늘날 더는 통용되지 않고, 과거의 기본 상식은 오늘날에는 이상한 상식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서서히 변화되고 진보해 나가는 존재입니다.
불교의 선과 진리를 향한 추구는 소중한 것이지만 그들의 모든 교리가 우리에게 동일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큰 오류가 됩니다. 불교 문화 안에서 자라나 훌륭한 불교 신자가 된 이들을 하느님은 내치지 않으시겠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모습을 기회가 된다면 차분한 대화를 통해서 그들에게 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물론 이를 잘못 이해한 일부 막나가는 종파들이 불상을 부수고 성모상을 무너뜨리는 식의 엉뚱한 행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치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지탄 받아야 하는 것이고 반복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진리의 빛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가는 길에 있어서 서로 진심어린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이 대화라는 것은 단순히 학적 토론이 아니라 이해와 포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며 단순히 ‘말잔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학식이 높은 신학자라지만 가난한 이웃을 한 번도 방문해보지 않은 사람보다는 불자이면서도 자비심으로 주변의 이웃을 진실한 마음으로 돌보는 이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더 아름다워 보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 남쪽 여왕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 왔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멀리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은 오직 별빛 하나에 의존해서 그 머나먼 길을 걸어 왔습니다. 세상 안에는 참된 진리의 빛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고 안심하고 있다가는 꼴찌가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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