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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히브 2,15)

최근 ‘해방’이라는 주제를 두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방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억압된 상태에서 풀려나는 것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무엇에 얽매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해방을 단순히 경제적 관점이나 사회적 지위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세상은 ‘전복되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지위를 회복해야 하고 모든 가난과 억압은 반드시 극복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 안에서의 이러한 ‘회복’은 정당하게 요구되는 일입니다. 우리는 가난하고 억압된 이들의 요구를 매번 무시하면서 고상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해방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가 하는 그 모든 회복의 노력은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됩니다.

참된 해방의 근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참된 해방의 근본은 단순히 지금의 세상의 구조를 바꾸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내면이 변화되지 않으면 가난한 이들이 부자가 된다 하더라도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근본적인 인간의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국 권력을 잡을 때에 이전의 기득권층이 행한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됩니다.

제가 이를 이해하는 이유는 ‘가난한 이들’과 직접 함께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상은 아닙니다. 가난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모든 이가 동일한 영적 상황에 머무르는 것도 아닙니다. 즉, 가난하고 소외되었다고 다 착한 법은 없습니다. 가난하고 소외 되었다고 아무런 분별 없이 무조건 우선적인 선택과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입니다. 물론 사회적인 차원에서 가난한 이들의 무리가 늘 ‘잊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회복되어야 하지만 가난한 이의 개개인으로 다가섰을 때에는 가난의 상황으로 인해서 그들이 무조건 사랑 받아야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해방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멀기만 합니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동일하게 고통받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의 위협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온갖 노력을 하고 살아가지만 최종적으로는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이 되기를 회피하셨습니다. 빵을 잔뜩 먹은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부유한 지위를 회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허기가 져서 이삭을 먹다가 바리사이들의 비난을 산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제자들과 함께 굶주림을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영원으로 초대하는 가르침을 전하셨지요.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이 세상의 불의가 쉽게 잠재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예수님 당신부터 불의 앞에 희생 되셨지요. 권력가들 앞에서 그분은 입을 닫으셨습니다. 그분은 이미 알고 계셨지요. 그들의 마음에 당신의 진리의 빛은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는 걸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변명하고 설명하지 않고 차라리 입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의 진정한 왕권을 선포하셨지요. 천상의 왕으로서 돌아올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는 합당한 선에서 불의를 없애기 위해서 저항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작업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죽음에서의 참된 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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