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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여기 볼리비아 신부님들은 제 나라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저 유명한 ‘북한’ 정도만 알지요. 그래서 제가 ‘남한’ 출신이라고 하면 모두 기본적으로 묻는 것이 있습니다.

“북한은 나쁜 나라이지요?”

그러면 저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합니다. 우리는 원래 한 민족이며 언젠가는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지요. 우리의 아픈 역사로 인해서 지금은 둘로 갈라졌지만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민족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모든 세상은 그렇게 하나의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지요.

하지만 왜 우리나라가 갈라졌는가에 대해서 저는 이런 설명을 합니다.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으로부터의 독립 이후에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로 갈라졌고 남한은 미국의 영향에 의해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시작했으며 북한은 러시아와 중국의 영향에 의해서 공산주의가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서 남한과 북한은 스폰서 나라들의 지원을 받아가며 서로를 공격한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요.”

그리고 덧붙입니다.

“아무리 그 나라가 악명이 높다고 해도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이 악마는 아닙니다. 그 안에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국가적인 차원의 명성은 언론이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언론을 조작하는 이들은 바로 강대국들입니다. 강한 나라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나라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필요하면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는 데에 써먹는 거지요. 그 대상 중의 하나가 북한인 셈입니다. 물론 북한이 때로 드러내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못하지요.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부분도 적지 않은 셈입니다. 남한의 지도자들도 때로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통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통일은 두 나라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아끼고 보듬어갈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의 상황으로는 아직 많은 문제가 산재해 있는 것 같습니다. 강대국들과 남북한의 각나라 지도자들이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통일이라는 것은 상당히 더딘 작업이 되겠지요.”

저는 미국이 단순한 우방국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미국과 적대적인 나라가 단순히 우리의 적대국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볼리비아는 미국과 그닥 좋은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볼리비아가 제 나라의 적이라고 간주할 필요는 없지요. 저는 볼리비아의 민중을 알고 있고 그들은 대부분 이런 정황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합니다. 말이라는 것은 말많고 힘있는 자들이 지껄여대는 것이라는 사실을 저는 이미 신학교에서부터 깨닫고 있었습니다. 정말 진정으로 일하는 사람은 말이 그닥 필요 없습니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할 뿐이지요. 언론이 말하는 것을 모조리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일과 그것을 해석한 일을 분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4중 추돌사고가 났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나라 모든 운전자가 부주의하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입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게 무조건 나쁘다고 간주하면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곳의 전원을 차단해서 그들을 분노하게 한 후에 컴퓨터 게임은 사람을 곧잘 분노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억지입니다.

세상에는 대부분 순진한 민중들이 살아갑니다. 가장 정치를 잘하는 왕은 민중이 왕이나 정치의 영향 없이도 평화롭게 살아갈 때에 가장 정치를 잘하는 것입니다. 왕이 민중을 화나게 하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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