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마르 9,10)
모르는 사람들이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면 답이 나올리가 없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바로 이런 모양새입니다. 모두가 스승으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사이트에서 음모론을 까발리는 듯한 기사를 접하면 그런 기사를 잃고 마치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앎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된 앎은 사람을 수평적인 생활에서 수직적인 생활로 이끌어 들어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잠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A와 B는 서로 앙숙 관계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살펴보면서 무엇을 해코지할까를 늘 찾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수단을 모두 써서 상대의 동태를 파악할 것입니다. 서로의 정보력에 따라서 상대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그들이 하려는 근본 목적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오’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지식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증오’라는 순환고리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때에 C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둘의 말을 듣고 절대로 판단하지 않지요. C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습니다. A와 B가 어디서 구체적으로 무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둘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둘이 쏟아내는 격정과 분노를 정작 아무런 탓도 없는 C가 혼자서 고스란히 받아들이지요. 그러는 동안 둘의 마음이 점점 녹아내려갑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 그리로 나아가지 못하지요. 우리가 스승님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아마 지금쯤은 상당히 나은 존재가 되어 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면 답이 나올리가 없습니다. 지금의 세상은 바로 이런 모양새입니다. 모두가 스승으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일 뿐입니다. 어느 사이트에서 음모론을 까발리는 듯한 기사를 접하면 그런 기사를 잃고 마치 자신이 무언가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것일 뿐입니다.
진정한 앎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참된 앎은 사람을 수평적인 생활에서 수직적인 생활로 이끌어 들어높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잠시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A와 B는 서로 앙숙 관계입니다. 서로는 서로를 살펴보면서 무엇을 해코지할까를 늘 찾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수단을 모두 써서 상대의 동태를 파악할 것입니다. 서로의 정보력에 따라서 상대의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알 수 있을 테지요. 그러나 그들이 하려는 근본 목적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증오’입니다. 이들은 서로의 지식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증오’라는 순환고리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때에 C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둘의 말을 듣고 절대로 판단하지 않지요. C는 그다지 똑똑하지 않습니다. A와 B가 어디서 구체적으로 무얼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다만 둘을 사랑할 뿐입니다. 그리고 둘이 쏟아내는 격정과 분노를 정작 아무런 탓도 없는 C가 혼자서 고스란히 받아들이지요. 그러는 동안 둘의 마음이 점점 녹아내려갑니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배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참된 사랑의 방향을 알지 못하고 그리로 나아가지 못하지요. 우리가 스승님의 목소리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아마 지금쯤은 상당히 나은 존재가 되어 있을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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