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에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그를 돌이키시겠습니까?
그를 심하게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면 그는 그렇게 꾸짖는 그 대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그를 통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그를 돌이킨 게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더 큰 힘으로 그를 억누르고 제압하려는 것 뿐이지요. 나아가서 그 꾸짖는 사람이 뭔가 뒤틀려 있다면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타인을 향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정당해야 하니까요.
교회는 잘못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도 잘못할 수 있고, 교회의 구성원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유다인들 앞에서 소극적인 모습으로 이방인들을 대해서 바오로 사도의 꾸중을 들었고, 제자들은 곧잘 누가 더 높은가로 예수님이 계신 데도 다투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잘못을 어떤 방식으로 꾸짖고 타이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가득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그를 향한 존경심을 놓치지 않았지요.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그 비판이 함부로 그의 품위를 손상치 않게 하려고 조심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존중해 주었지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에 그를 돌이키는 방법이 따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지요.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결함을 지적하되 그것이 다른 것들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것입니다. 마치 요셉 성인이 성모님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 가톨릭의 이름을 걸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진리의 칼날을 쥐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선량한 많은 것들마저도 깨부수고 있는 언론사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참된 개혁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개혁가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숨은 악행을 공공연히 군중들에게 설파하면서 ‘모든 바리사이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악의에 분노하기도 하셨지만 다시 그들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신 분이시고 결국에는 당신 스스로 그들의 어둠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어바치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고 감싸 안으려 하신 분이시지요.
올바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때에 어떤 방법을 쓰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요. 암수술을 하는데 식칼을 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손을 씻지도 않고 소독하지도 않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쥐락펴락하면 그건 그 사람더러 죽으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지요. 수술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중함과 섬세함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치려는 것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그것을 올바로 고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올까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에 그를 고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를 심하게 꾸짖을 수 있습니다. 그가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줄 수도 있지요. 그러면 그는 그렇게 꾸짖는 그 대상을 두려워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그를 통제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그를 돌이킨 게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더 큰 힘으로 그를 억누르고 제압하려는 것 뿐이지요. 나아가서 그 꾸짖는 사람이 뭔가 뒤틀려 있다면 그것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게 됩니다. 타인을 향해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장 정당해야 하니까요.
교회는 잘못할 수 있습니다. 교황님도 잘못할 수 있고, 교회의 구성원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유다인들 앞에서 소극적인 모습으로 이방인들을 대해서 바오로 사도의 꾸중을 들었고, 제자들은 곧잘 누가 더 높은가로 예수님이 계신 데도 다투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잘못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잘못을 어떤 방식으로 꾸짖고 타이를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꾸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가득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행동을 비판했지만 그를 향한 존경심을 놓치지 않았지요.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그 비판이 함부로 그의 품위를 손상치 않게 하려고 조심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때에는 언제나 그것을 존중해 주었지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에 그를 돌이키는 방법이 따로 딱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 있지요.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결함을 지적하되 그것이 다른 것들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척이나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할 것입니다. 마치 요셉 성인이 성모님의 임신 사실을 알고 ‘조용히’ 파혼하려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최근 가톨릭의 이름을 걸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마치 자신이 모든 진리의 칼날을 쥐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선량한 많은 것들마저도 깨부수고 있는 언론사를 바라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참된 개혁은 그런 게 아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개혁가이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숨은 악행을 공공연히 군중들에게 설파하면서 ‘모든 바리사이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악의에 분노하기도 하셨지만 다시 그들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신 분이시고 결국에는 당신 스스로 그들의 어둠에 뛰어들어 목숨을 내어바치시면서도 그들을 사랑하고 감싸 안으려 하신 분이시지요.
올바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노력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때에 어떤 방법을 쓰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지요. 암수술을 하는데 식칼을 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손을 씻지도 않고 소독하지도 않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쥐락펴락하면 그건 그 사람더러 죽으라는 말 밖에는 되지 않지요. 수술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중함과 섬세함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치려는 것을 사랑할 때에 비로소 그것을 올바로 고칠 수 있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올까요?
누군가 잘못을 했을 때에 그를 고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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