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바리사이는 복음에서 서로 앙숙으로 비춰집니다. 하지만 그 내면은 전혀 다른 모습이지요. 예수님은 바리사이들마저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며 반대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증오하고 죽이려고 하였으니까요.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것은 비판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들이 올바른 길을 찾게 도와주신 것이지요. 반대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한 것은 비난이었습니다. 뭐든 보이는 대로 꼬투리를 잡고 해코지를 할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었지요.
누군가를 ‘비판’한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만날 때에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서로는 서로를 향해서 정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우겨댈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비난일지 비판일지는 지켜보는 이들이 올바른 기준으로 분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비난과 비판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식견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미 그 분별을 하고 옳지 못한 것은 알아서 피하고 있을 것이기에 별다른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비난인지 무엇이 비판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가서 그의 행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충고해주면 그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도리어 화를 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비유로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그들은 배우려고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싸우려고’ 지식을 얻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이 아무리 신학이니 뭐니 해도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화가 나 있고 뭐든 보이는 대로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리사이들에게 하신 것은 비판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실을 드러내고 그들이 올바른 길을 찾게 도와주신 것이지요. 반대로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에게 한 것은 비난이었습니다. 뭐든 보이는 대로 꼬투리를 잡고 해코지를 할 준비를 하려고 하고 있었지요.
누군가를 ‘비판’한다고 주장하는 기사를 만날 때에 우리가 분별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마도 서로는 서로를 향해서 정당한 비판을 하고 있다고 우겨댈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비난일지 비판일지는 지켜보는 이들이 올바른 기준으로 분별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상황이 아이러니한 이유는, 비난과 비판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을 정도의 식견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미 그 분별을 하고 옳지 못한 것은 알아서 피하고 있을 것이기에 별다른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비난인지 무엇이 비판인지도 모르는 이에게 가서 그의 행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충고해주면 그는 그 충고를 받아들이기는 커녕 도리어 화를 낼 것입니다.
예수님이 늘 비유로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유로만 말하였으니, ‘저들이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루카 8,10)
그들은 배우려고 지식을 얻는 게 아니라 ‘싸우려고’ 지식을 얻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이 아무리 신학이니 뭐니 해도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것이지요. 그들은 화가 나 있고 뭐든 보이는 대로 파괴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