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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든 하느님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신명 4,34)

우리가 모시는 하느님은 우리를 구해내시는 분, 우리를 이끌어내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때로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런 하느님을 두고 ‘아니’라고 거부합니다. 그토록 위대하신 분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어야 하고 그런 완전한 분은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언제나 진득하게 큰 바위산처럼 아무런 말도 없고 행동하는 것도 없이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이 ‘상상하는’ 신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보다 경박합니다. 그렇게 남을 잘 도울 신 같으면 왜 자신은 돕지 않느냐고 우겨대지요. 자신이 처한 모든 궁핍함을 일순간에 해결해 주지 않고, 자신이 당하는 곤란함을 해소시켜주지 않는 신이니 냉정하고 매정한 신이라고 매도를 해 버리고 맙니다.

두 주장에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머릿 속으로 ‘만들어 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계시고 활동하시는 분을 받아들이려고 시도하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 속에 만들어져 있는 신이 진정한 신이어야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가 누구이길래 우리의 창조주를 우리의 생각대로 조정하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이는 크나큰 오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현재 하나 내 마음대로 바꾸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헌데 우리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자유로 원하는 일을 하실 수 있으며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시는 그 분을 우리 마음대로 조정하려고 하니 얼마나 엉뚱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난 하느님,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은 바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쓰는 신’이십니다. 그렇게 하려는 목적은 사람들이 인간의 힘이나 세상의 힘에 기대지 않고 하느님의 참된 힘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하느님이 어느 민족을 선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당신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든 청원을 들어주지 않는 이유는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시고 다가올 그 결과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청할 때에 정말 지혜를 가지고 청한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올바로 청하기보다는 대부분 우리의 사사로운 탐욕에 사로잡혀 청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하느님은 그러한 청들을 전혀 다른 방법으로 들어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하느님은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는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게 합당하고 옳은데 하느님은 그런 나를 도와주시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알려고 노력하는 만큼 알 수도 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이해를 추구하고 참된 이해는 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구해 내신 분이고,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어 그 위업을 완수하시려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또다른 이집트에서 해방을 기다리고 있는 민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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