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선한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지요. 그 선은 여러가지 덕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유, 자비, 신의, 친절, 선행, 진실, 정의 등등과 같은 것들이지요. 우리는 선한 이들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이들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선함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에게 나아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 하느님의 선함과 멀어지려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즉 하느님의 선함을 거부하고 악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서 가려는 방향과 반대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 방향의 근본은 바로 ‘자기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기준으로 삼는 선함과 악함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선호도’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마음에 들면 선한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가령, 저는 본당에서 ‘나쁜 신부’(Padre malo)라는 소리를 종종 듣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때로 바른 결정을 내리고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사모임을 5시에 하기로 하고는 5시에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교사들(늦게 오는 교사들)은 저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제 시간에 오려고 노력하고 약속을 지키려는 교사들에게는 도리어 좋은 신부인 것은 아닐까요? 이처럼 사람들의 ‘선호도’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성의 구분은 저마다 달라지는 셈입니다.
‘온유함’, ‘자비’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조건 온화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가 아프다고 한다고 해야 할 수술을 하지 않고 가짜 비타민이나 줘서 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의사가 수술 후에 다가올 여러가지 후유증들로 인한 비판이 두려워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할 일을 하지 않고 환자를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나쁜 짓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불필요한 수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에게 수술이 필요한지 아닌지 여러가지 정황들을 바탕으로 분별을 할 필요가 있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믿고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딱히 거기에 대해서 올바른 지적을 해 주는 이도 없어서 그런 줄 믿고 살고 있기도 하지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환경 속에서 자란 남자 아이는 남자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즉, 남자가 인내심을 갖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대화를 하려는 노력을 다른 어디에서도 롤모델로 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볼리비아에는 실제로 그런 가정들이 많지요. 그런 가정들 앞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바를 말하면 때로는 놀라는 반응도 많습니다. ‘남자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 양반 상놈이 있던 시절에 종들은 당연히 권리도 없고 그저 삼시 세끼 밥이나 챙겨 먹으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생각이 들어와 결국 올바른 생각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전히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 훌륭하고 멋진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술을 절제할 줄 알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 하느님의 선함과 멀어지려는 경향이 존재합니다. 즉 하느님의 선함을 거부하고 악을 저지르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향해서 가려는 방향과 반대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그 방향의 근본은 바로 ‘자기 자신의 욕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기준으로 삼는 선함과 악함의 기준과는 전혀 다른 기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들의 선호도’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마음에 들면 선한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가령, 저는 본당에서 ‘나쁜 신부’(Padre malo)라는 소리를 종종 듣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제가 때로 바른 결정을 내리고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사모임을 5시에 하기로 하고는 5시에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교사들(늦게 오는 교사들)은 저를 ‘나쁘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제 시간에 오려고 노력하고 약속을 지키려는 교사들에게는 도리어 좋은 신부인 것은 아닐까요? 이처럼 사람들의 ‘선호도’를 바탕으로 하는 윤리성의 구분은 저마다 달라지는 셈입니다.
‘온유함’, ‘자비’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조건 온화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맙니다. 그러나 의사가 환자가 아프다고 한다고 해야 할 수술을 하지 않고 가짜 비타민이나 줘서 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오히려 의사가 수술 후에 다가올 여러가지 후유증들로 인한 비판이 두려워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할 일을 하지 않고 환자를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나쁜 짓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불필요한 수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에게 수술이 필요한지 아닌지 여러가지 정황들을 바탕으로 분별을 할 필요가 있지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고 믿고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딱히 거기에 대해서 올바른 지적을 해 주는 이도 없어서 그런 줄 믿고 살고 있기도 하지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환경 속에서 자란 남자 아이는 남자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즉, 남자가 인내심을 갖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 대화를 하려는 노력을 다른 어디에서도 롤모델로 본 적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볼리비아에는 실제로 그런 가정들이 많지요. 그런 가정들 앞에서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는 바를 말하면 때로는 놀라는 반응도 많습니다. ‘남자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과거 양반 상놈이 있던 시절에 종들은 당연히 권리도 없고 그저 삼시 세끼 밥이나 챙겨 먹으면 잘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전혀 다른 생각이 들어와 결국 올바른 생각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전히 많은 남성들 사이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이 뛰어난 사람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한 술을 많이 마시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 훌륭하고 멋진 모습이라고 착각하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술을 절제할 줄 알고,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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