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마치 나쁜 악당처럼 죄지은 사람에게 벌을 내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바로 스스로에게 벌을 내리는 거라고 말이지요. 오히려 하느님은 그런 그들을 구하고 살리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먼저 죄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우리 스스로의 결정으로 멀어지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정말 외압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행동이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의 업적이 아니고, 반대로 나쁜 것이라고 해도 그의 탓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우리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요. 우리 자유의지와 깊게 연관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에게 합당한 결과가 다가오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기에서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영혼이 죽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은(혹은 죽다시피 한) 영혼을 들고 훗날 고통받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한때 건장했던 운동선수가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라보면서 신세 한탄을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맑은 영혼이 온통 어두워진 상태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보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상상조차 힘들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만 필요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즉,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는 상을 그리고 그릇된 길을 걷는 이에게는 벌을 마련해 두신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톨릭의 4대교리 중 하나인 ‘상선벌악’의 개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에게는 분명한 잣대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분별하시고 우리가 결정한 것에 따른 결과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회개’라는 것이 개입이 됩니다. 즉, 그릇된 길을 걷던 이가 발길을 돌이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회개는 이전까지 우리의 모든 어두움과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없애 주고, 영원한 상급을 얻을 희망을 약속해주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나아가 그분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모든 활동은 바로 이 ‘회개’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어둠에 빠져 있는 이에게 ‘회개’의 은총을 선물하고, 또 스스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에게 다시 깨달음을 주고 ‘회개’를 선물하는 것이지요. 이를 ‘복음화’라고도 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정신대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순한 ‘형식적 신앙생활’에만 빠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회개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의 단순한 외적 형태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어느 경쟁심이 가득하던 젊은이가 회개를 한답시고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 봅시다. 헌데 이 수도원 안에서 다른 수사들과 ‘기도’로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 수도자는 껍데기만 수도복을 입었을 뿐, 내면이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는 셈입니다. 참된 회개는 적지 않은 내면의 결단과 그 구체적인 실현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휠체어를 쓰면 다리에 근육이 약한 이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일어나 걷기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다리에 힘이 붙으니까요. 결국은 스스로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 없이 용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방치입니다. 마약을 하는 자녀를 살리려면 먼저 마약을 끊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헌데 마약을 그대로 허용하면서 매 순간 자녀가 입으로만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마약을 했습니다.’라고 한다고 그 순간에 ‘그래 그럼 너를 용서하마’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올바른 용서가 아닌 것이지요. 먼저는 그가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충고, 타이름, 훈계, 질책, 교정벌)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분명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용서라는 것이 그가 여전히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데도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그 회개라는 것은 적지 않은 내면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아무런 나의 내면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죄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하고 그분의 모든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서 우리 스스로의 결정으로 멀어지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정말 외압에 의해서 어떤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었다면 그 행동이 좋은 것이라고 해도 그의 업적이 아니고, 반대로 나쁜 것이라고 해도 그의 탓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우리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지요. 우리 자유의지와 깊게 연관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에게 합당한 결과가 다가오게 됩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기에서 죽음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영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그 영혼이 죽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죽은(혹은 죽다시피 한) 영혼을 들고 훗날 고통받게 되는 것이지요. 마치 한때 건장했던 운동선수가 자신의 망가진 몸을 바라보면서 신세 한탄을 하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맑은 영혼이 온통 어두워진 상태가 되어 영겁의 시간을 보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마 상상조차 힘들 것입니다.
하느님은 다만 필요한 조치를 취하신 것입니다. 즉, 올바른 길을 걷는 이에게는 상을 그리고 그릇된 길을 걷는 이에게는 벌을 마련해 두신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가톨릭의 4대교리 중 하나인 ‘상선벌악’의 개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에게는 분명한 잣대가 있으며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내면을 분별하시고 우리가 결정한 것에 따른 결과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여기에 ‘회개’라는 것이 개입이 됩니다. 즉, 그릇된 길을 걷던 이가 발길을 돌이켜 다시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이 회개는 이전까지 우리의 모든 어두움과 그에 해당하는 징벌을 없애 주고, 영원한 상급을 얻을 희망을 약속해주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나아가 그분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모든 활동은 바로 이 ‘회개’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어둠에 빠져 있는 이에게 ‘회개’의 은총을 선물하고, 또 스스로 잘 나아가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에게 다시 깨달음을 주고 ‘회개’를 선물하는 것이지요. 이를 ‘복음화’라고도 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의 정신대로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순한 ‘형식적 신앙생활’에만 빠져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회개라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의 단순한 외적 형태로만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어느 경쟁심이 가득하던 젊은이가 회개를 한답시고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해 봅시다. 헌데 이 수도원 안에서 다른 수사들과 ‘기도’로 경쟁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 수도자는 껍데기만 수도복을 입었을 뿐, 내면이 하나도 변화된 것이 없는 셈입니다. 참된 회개는 적지 않은 내면의 결단과 그 구체적인 실현을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휠체어를 쓰면 다리에 근육이 약한 이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스로 일어나 걷기 시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야 다리에 힘이 붙으니까요. 결국은 스스로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를 통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개 없이 용서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방치입니다. 마약을 하는 자녀를 살리려면 먼저 마약을 끊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책입니다. 헌데 마약을 그대로 허용하면서 매 순간 자녀가 입으로만 ‘아버지 죄송합니다. 제가 마약을 했습니다.’라고 한다고 그 순간에 ‘그래 그럼 너를 용서하마’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올바른 용서가 아닌 것이지요. 먼저는 그가 마약을 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충고, 타이름, 훈계, 질책, 교정벌)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하느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분명히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용서라는 것이 그가 여전히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는데도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얻기 위해서는 ‘회개’가 필요하고, 그 회개라는 것은 적지 않은 내면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저 입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아무런 나의 내면의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