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순교자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지요. 하지만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올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내 선조가 순교자였다고 내가 순교자인 것은 아닙니다. 그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요.
한 가족의 부모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능성’이 커질 뿐이지요. 영적으로 좀 더 나은 환경에 처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곧 그들의 마음에 신앙을 불어넣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유산이라는 것은 그것이 올바로 전해질 때에 자녀들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유산이 많아도 자녀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더는 ‘유산’이 아닌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자녀들이 신앙을 가질 반대의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이 ‘핏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범죄자의 자녀를 입양해서 훌륭한 자녀로 키울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고, 반대로 어느 귀족 집안의 자녀가 다른 곳에 입적되어 삶이 피폐해 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유다인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만일 하느님에 대한 참된 신앙이 핏줄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알아보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각자의 고유한 선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도리어 반대로 유다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고향 친지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더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들입니다. 같은 민족 안에 신앙의 순교자들이 있지요.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피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녔던 신앙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남기셨지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악행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외적으로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에만 열을 쏟으면서 정작 순교자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손이 아니라 그들을 죽인 무뢰배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자신의 나라에 ‘성인’을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작용을 해서 순교자를 ‘발굴’해 내는 것이라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 신앙을 교계적으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그들의 덕행을 따를 수 있다고 선포하는 과정입니다. 헌데 순교자이긴 하지만 성인들의 숫자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삶을 고고학 발굴하듯이 발굴해서 우리더러 그분을 성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고 뭔가 어색한 것이 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든 성인 명단에 올리고 그들이 머물던 곳에 유적지를 세우고 난 뒤에 정작 그들의 신앙을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이 진정 순교자를 사랑하는 길인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한 가족의 부모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자녀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다만 ‘가능성’이 커질 뿐이지요. 영적으로 좀 더 나은 환경에 처할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곧 그들의 마음에 신앙을 불어넣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의 유산이라는 것은 그것이 올바로 전해질 때에 자녀들의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유산이 많아도 자녀들에게 전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더는 ‘유산’이 아닌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도 존재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엉망으로 살아도 자녀들이 신앙을 가질 반대의 가능성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신앙이 ‘핏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범죄자의 자녀를 입양해서 훌륭한 자녀로 키울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고, 반대로 어느 귀족 집안의 자녀가 다른 곳에 입적되어 삶이 피폐해 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유다인들을 보아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만일 하느님에 대한 참된 신앙이 핏줄로 이어지는 것이었다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외아들을 알아보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각자의 고유한 선택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도리어 반대로 유다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고향 친지들은 자신들의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을 더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손들입니다. 같은 민족 안에 신앙의 순교자들이 있지요.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피를 물려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녔던 신앙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신앙은 외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비슷한 말씀을 남기셨지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그것으로 자신들의 악행을 증명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외적으로 순교자들의 무덤을 조성하는 데에만 열을 쏟으면서 정작 순교자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오류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의 후손이 아니라 그들을 죽인 무뢰배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꼴이 됩니다.
자신의 나라에 ‘성인’을 많이 가지려는 욕심이 작용을 해서 순교자를 ‘발굴’해 내는 것이라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서 그 신앙을 교계적으로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그들의 덕행을 따를 수 있다고 선포하는 과정입니다. 헌데 순교자이긴 하지만 성인들의 숫자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우리가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삶을 고고학 발굴하듯이 발굴해서 우리더러 그분을 성인으로 모셔야 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순서가 잘못된 것이고 뭔가 어색한 것이 됩니다.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른 표현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이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어떻게든 성인 명단에 올리고 그들이 머물던 곳에 유적지를 세우고 난 뒤에 정작 그들의 신앙을 잊어버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이 진정 순교자를 사랑하는 길인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