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대화의 이면

모든 말에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잠시 나누어보면 그가 하는 말의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일상적으로 하는 말, 그가 하는 질문, 그의 농담들 속에서 우리는 그의 내면에 든 것을 엿볼 수 있게 되는 법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중해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들 ‘자신’에게 집중된 이야기를 하지요. 상대의 이야기를 듣는 척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말할 기회를 노리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지요. 자신이 주목 받아야 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만큼 ‘듣는’ 사람이 없고, 따라서 모든 대화는 일종의 ‘경쟁’이 가미되는 것입니다. 더 흥미로운 이야기, 더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위해서 사람들은 타자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것에 허풍을 조금씩 가미합니다. 그래서 모든 군대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뻥튀기가 된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루한 군대생활을 상대에게 전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늘 선임병에게 시달리고 죽을 것 같던 군대 생활이 휴가를 나오면 마치 자신이 특수부대원이라도 된 듯한 인상을 심어주는 이야기로 변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분별하다보면 우리의 일상적인 대화 안에 ‘공허’가 얼마나 가미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수많은 말을 지껄이지만 대부분이 공허한 이야기인 셈이지요. 정작 자기 자신의 내면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거품이 가득 든 자신을 내보이고, 세상의 소식들을 서로 나누고, 호기심거리들에 대한 정보를 서로 나누면서 그 수많은 시간을 ‘공허’로 채워가는 것이지요.

그런 공허의 요소들을 위해서 체험해 보아야 할 것도 많아지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는 셈입니다. 적어도 해외여행을 어디 정도는 다녀와야 사람들이 솔깃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고, 적어도 최신 소설을 읽거나 가장 최근의 영화를 봐야 그걸 아직 접하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체험이 없으면 ‘거짓말쟁이’, 혹은 ‘허풍쟁이’가 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밀’을 사정없이 떠벌리는 사람이 되곤 하지요.

여러분,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내면의 시선으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솔한 대화를 아는 이, 영적인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즐기는 이를 분별하십시오. 그렇지 않은 채로 이 이야기든 저 이야기든 분별없이 받아들이면 결국 마음이 쓰레기통이 됩니다. 세상이 하는 광고 전략이라는 것이 비슷합니다. 수도없이 그 대상을 노출함으로써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 전략이지요. 실제로 우리 가운데 코카콜라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공적인 전략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진짜배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평가절하되어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아간 성인들 중에 제 본래의 영광의 위치를 누린 성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치부하곤 했지요. 그리고 그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자기 알리기에 혈안이 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서 조금씩 ‘고독’을 즐기는 법을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