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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아들이는 것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 볼까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실 거기에 있는 그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분석한 세상입니다. 지금 내가 바라보는 내 앞의 손은 그 자체의 손이 아니라 내 눈 이 시각정보를 통해서 받아들이고 내가 구성해낸 손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손의 냄새를 맡으면 그 냄새는 코를 통해서 후각정보로 구성되어 다시 뇌에서 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의 모양과 냄새가 내 안에 결정이 되는 것이지요.

이를 뒤집어서 생각하면 내가 조합해 내는 세상을 우리는 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눈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도 내 안에서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조합해 낼 수 있다면 그것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헛된 믿음’도 존재합니다. 거기에 없는 것을 억지로 짜맞추어 조합해 낸 것이지요. 그것은 헛된 믿음이고 실존하지 않는 것인데 우리가 억지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서낭당 나무에는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는데 우리는 거기에 ‘믿음’을 통해서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입니다. 마을 어귀의 돌산은 그냥 돌의 집합체일 뿐인데 우리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 때문에 거기에 신성한 힘을 불어 넣으려고 시도 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바로 헛된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합당한 존재에게 믿음을 전하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일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최대한의 믿음을 부여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니 오히려 그럼에도 믿음이 부족할 대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분이 단순히 감각으로 ‘체험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고 거부합니다.

사람들은 ‘징표’를 기다립니다. 기이한 현상, 자신의 눈으로 직접 바라보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기다리지요. 그 정도는 되어야 하느님을 인정할 수 있겠다고 합니다. 반면, 하느님이 한 어린 영혼의 모습으로 다가올 때에 우리는 그 영혼 안에 깃들어 있는 거룩한 영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다가온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지요. 그리고 수난 당하고 몰골이 엉망이 된 자신들의 임금을 조롱하고 침뱉고 구타한 것입니다.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버렸지요.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는 이들은 참으로 불행한 이들입니다. 자신들이 두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실은 전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 전혀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되어갑니다. 자신이 가톨릭에 교적을 두고 있고 성당에 미사를 나간다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마음은 이미 ‘보이는 것’에 치중해 있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자,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지요.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버린 냉냉하고 관습적인 가톨릭 신자보다는 차라리 하느님을 믿기 힘들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무신론자가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하느님을 믿고 그 믿는 바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이가 가장 나을 테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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