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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세상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1코린 7,31)

이 세상의 형체는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슨 물리학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가는 곳’일 뿐입니다. 사람은 그 짧은 자신의 수명 동안에만 세상을 이용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사라져갑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크나큰 계획, 영원한 계획 속에서도 세상은 사라져갑니다. 세상은 시작이 있었고, 마침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마침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지만, 시작이 있는 것은 마침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시작도 마침도 없으신 분의 손길에 이끌려 그분의 자녀로 입양된 이들에게는 ‘죽음’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인들은 이 사라져가는 세상 안에서 한 몫 보는 이들입니다. 자신의 악행으로 세상의 좋은 것을 잔뜩 누리려고 하지요. 허락되지 않은 몫까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서 의인들이 고통을 받게 마련입니다.

누군가 쓰레기를 버리면 다른 누군가가 치워야 합니다. 악인은 쓰레기를 버리고 그 쓰레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책임감에서 해방되어 ‘안락함’을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들은 그 쓰레기를 치우면서 자신이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지고 여러모로 ‘불편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타인의 책임을 지게 된 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상급이 주어지게 되고, 자신의 책임을 내던진 이에게는 그에 합당한 책임 추궁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이 세상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영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악인들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그들 처럼 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 중에 세금을 제대로 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금이라는 것은 벌어들인 것 중의 일부를 환원해서 모든 이에게 이득이 돌아갈 수 있게 하는 제도인데, 부자는 세금을 내지 않고 관리들은 가난한 이에게서 거두어들인 세금으로 백성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배를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일들에는 그 합당한 결과가 필요할 것 같은데 그 일들은 이 세상에서 ‘완수’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야당이 승리하고, 또 새로운 인물이 나서서 청소를 깨끗이 한다고 해도 어딘가에서는 다시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등장하게 될 것이고 그의 악행은 다시 선한 이들이 고통을 받게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해야 하지요.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모든 이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노선을 드러내고 정권교체를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정의는 지극히 작은 데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된 정의는 지극히 깊은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어딜 가서 무엇을 하던지 의로운 일을 하고, 반대로 악한 사람은 아무리 겉으로 선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도 악행을 저지르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라고 해서 모두 착하라는 법은 없는 셈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바운더리에 대한 규정일 뿐인 것이지요. 참된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흘만에 새로이 세워질 교회, 즉 무너지고 말 건물이 아니라 십자가 아래에 모여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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