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24)
호화로운 것을 보려면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을 가야 합니다. 권력의 자리를 보려면 청와대나 백악관을 가야겠지요. 유명세를 찾는다면 충무로나 헐리우드에 가면 됩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이 보이는가요? 그렇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보입니다. 우리 문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십자가라는 형벌 도구, 세상의 일종의 상징이 된 도구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예쁜’ 십자가를 찾곤 하지요. 목적이 십자가의 본질적인 의미이기보다는 ‘장식’에 가까운 그런 십자가들을 찾아 자신들의 거주공간을 꾸미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먼저는 우리의 ‘시각’이 모든 것에 앞서 작용을 해서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들을 막아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내재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그분이 감내한 수난과 고통, 그리고 지금도 우리들 때문에 감내하고 있는 수난과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난과 고통으로 다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그분의 영광을 ‘믿음’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위대하심에 본래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은 절대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입니다.
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나약한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종교생활’로 내비칠 뿐입니다. 교회는 그 내면의 가치보다 외면의 가치, 즉 건물의 크기와 신앙 조직의 규모로 가늠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새 신자 모아들이기입니다. 숫자로 주목을 받고 숫자로 다른 곳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사람은 ‘영원의 가치’로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는 뇌물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바라보면서 참 사랑에 다가서는 사람이지요.
호화로운 것을 보려면 자본주의의 상징인 백화점을 가야 합니다. 권력의 자리를 보려면 청와대나 백악관을 가야겠지요. 유명세를 찾는다면 충무로나 헐리우드에 가면 됩니다. 통상적으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무엇이 보이는가요? 그렇습니다. 고통을 받고 있는 한 남자가 보입니다. 우리 문화와는 전혀 맞지 않는 십자가라는 형벌 도구, 세상의 일종의 상징이 된 도구가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예쁜’ 십자가를 찾곤 하지요. 목적이 십자가의 본질적인 의미이기보다는 ‘장식’에 가까운 그런 십자가들을 찾아 자신들의 거주공간을 꾸미려고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먼저는 우리의 ‘시각’이 모든 것에 앞서 작용을 해서 우리가 정말 보아야 할 것들을 막아버리기가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 내재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분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그분이 감내한 수난과 고통, 그리고 지금도 우리들 때문에 감내하고 있는 수난과 고통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수난과 고통으로 다시 그분의 인내와 사랑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다시 오실 그분의 영광을 ‘믿음’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그분의 위대하심에 본래의 가치를 부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앞에서 겸손해 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것은 절대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일상적 행위입니다.
이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이라는 것은 나약한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은 ‘종교생활’로 내비칠 뿐입니다. 교회는 그 내면의 가치보다 외면의 가치, 즉 건물의 크기와 신앙 조직의 규모로 가늠될 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집중하는 것은 새 신자 모아들이기입니다. 숫자로 주목을 받고 숫자로 다른 곳을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사람은 ‘영원의 가치’로 모든 것들을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이는 뇌물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공정하게 바라보면서 참 사랑에 다가서는 사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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