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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3주

원래 교회가 전례적으로 짜 놓은 구상 대로라면 빛이 점점 밝아오면서 우리는 점점 기쁨에 차오릅니다. 그래서 이 주간부터는 우리는 영적으로 밝은 상태, 즉 이미 우리 안의 어둠을 씻어내고 기쁨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이 날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각자 각자 떨어뜨려서 돌보시는 분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며 돌보시는 분입니다. ‘개인적 구원’, ‘이기적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 혼자 열심해서 하늘나라에 가보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한 몸으로 한 분이신 예수님을 머리로 두는 하나의 교회인 셈입니다. 따라서 우리 몸의 한 지체가 병들고 가난하고 아파하는데 다른 지체가 머리가 지시하는 바를 무시하고 그대로 자기 좋을 대로만 머물러 있는다면, 머리는 아파하는 지체를 보살피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는 지체를 잘라내고 말 것입니다.

저 혼자 잘난 지체는 ‘암세포’와 같은 것입니다. 몸 전체의 모든 양분을 끌어들여 자기 혼자 증식하고 자기 몸뚱아리를 키워나가 결국에는 전체 몸을 죽여 버리는 그 지체는 제거되지 않으면 전체 몸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암세포는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의 이기적인 지체도 머리의 분별에 의해서 그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것이지요. 그와 더불어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왜 힘이 드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남는 것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 나눠야 합니다. 우리에게 쓰이지도 않으면서 나의 소유욕으로 지니고 있는 것은 ‘썩기’ 시작합니다. 단순히 물질적으로 썩는 것만이 아니라 나의 탐욕으로 영적으로 썩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영적으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탐욕으로 더럽혀진 더러운 재물이 됩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아무리 돈을 많이 퍼부어도 자신들의 병에 전혀 차도가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가진 것을 나눌 줄 알았다면 하느님이 그 마음을 아름답게 보시고 ‘사랑을 드러내는 일’을 하셨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이 일을 ‘기적’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기적을 호기심으로 대하고, 기적을 사려는 이들은 절대로 그 기적을 얻지 못합니다. 기적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사랑의 표지로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기한 일을 보고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의 기적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대림 3주의 초가 밝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어두움을 벗어버렸으니 선한 일로 덕을 쌓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시고 가난하고 헐벗은 이들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가난이 반드시 돈이라는 법은 없습니다. 의외로 부유한 이들 가운데에서 더 애정에 목말라하고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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