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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고생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죄지은 인간들에게 마련하신 바입니다. 우리는 지상에 사는 동안 수고해서 그 수고의 열매를 먹게 됩니다. 다만 그 수고를 어디에서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저마다의 소명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지만 그 수고 자체가 사라지는 일은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대로 수고를 합니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고 그리고 그 일용할 양식을 얻고 나면 쉴 줄도 압니다. 그들은 가진 것이 부족하기에 가진 것 그대로 즐기고 살기를 배워야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부요한 자는 부요한 대로 수고를 합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그 가진 것을 바탕으로 삶을 즐기는 것이지요. 벤츠가 있다면 그 유지비가 당연히 들어가고 그만큼의 더 많은 돈이 필요한 셈입니다. 그들은 많이 소유해서 고민이고 소유한 것 안에서 즐기면서 살기를 배워야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특별한 소명을 지닌 이들도 수고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특별한 소명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제는 사제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열심히 살아가야 합니다. 저마다의 소명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의 삶을 탐내기 시작하고 결국 제 길에서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고독과 더불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성사들을 집전하는 데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나머지 것들은 하느님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수도자들은 공동체 생활과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충만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고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서로의 고생의 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그러니 선교사라고 나은 것도 없고, 겉으로 보기에 별달리 고생하지 않아 보이는 이라고 해서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저마다의 고생 거리 속에서 사는 셈이지요.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이에게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타인을 위한 고민을 시작한 사람이지요. 하지만 이를 이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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