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욕정에 사로잡히고 나면 선악을 분간하기 힘들어합니다. 아니, 사실 악에 더 기울고 선한 것이 무엇인지 올바로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겠습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을 욕정에 사로잡힌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욕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먹는 행위’에 중독되거나 아니면 특정 음식에 중독되어 그것을 열렬히 추구하면서 본질적인 삶의 요소들도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중독 상태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남들이 다 드러내는 모양새니 나도 그렇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중독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참되고 올바른 길을 찾아낼 능력이 쇠약해져 있지요.
간단한 지표로 이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만일 극장에서 최신 영화가 개봉해서 보좌 신부님이 초대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와, 오늘 저녁에 기도 모임이 있어서 보좌 신부님이 초대다는 소식을 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최신 영화 소식에 귀가 더 솔깃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이미 ‘최신, 영화’와 같은 것들에 더 열려있기 때문이지요. 반면 ‘성체, 기도, 미사, 자선’과 같은 단어들에는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위 ‘특정 종교’가 하는 ‘특정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늘 선교를 시작할 때면 이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려주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기초명제에서부터 가르침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로잡힌 욕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중독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해방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해방은 몇 사람이 모여 구호를 외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진정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만끽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을 욕정에 사로잡힌다고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욕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먹는 행위’에 중독되거나 아니면 특정 음식에 중독되어 그것을 열렬히 추구하면서 본질적인 삶의 요소들도 무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마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중독 상태에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남들이 다 드러내는 모양새니 나도 그렇게 할 뿐이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어느 정도의 중독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참되고 올바른 길을 찾아낼 능력이 쇠약해져 있지요.
간단한 지표로 이런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만일 극장에서 최신 영화가 개봉해서 보좌 신부님이 초대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와, 오늘 저녁에 기도 모임이 있어서 보좌 신부님이 초대다는 소식을 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최신 영화 소식에 귀가 더 솔깃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이미 ‘최신, 영화’와 같은 것들에 더 열려있기 때문이지요. 반면 ‘성체, 기도, 미사, 자선’과 같은 단어들에는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위 ‘특정 종교’가 하는 ‘특정한 행위’에 불과한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로 마음을 돌리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늘 선교를 시작할 때면 이 기초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하느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알려주는 데에서부터 시작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기초명제에서부터 가르침을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사로잡힌 욕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중독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해방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해방은 몇 사람이 모여 구호를 외치는 데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진정 내면으로부터 자유로움을 만끽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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