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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

남녀 두 사람이 만나고 서로 끌리는 것을 느낍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표현입니다. 사랑을 언제 알 수 있는가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힘겨움’이 되었을 무렵입니다. ‘그럼에도 사랑하는가?’를 물을 때에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이끌림은 머지 않아 다른 사람에게서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이끌림 중에서도 지금의 배우자를 사랑하는가를 물을 때에 비로소 ‘사랑’의 본질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사랑’이라는 핑계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은 숫제 시작도 하지 않고 끝나 버립니다. 뜨거운 냄비마냥 달궈졌다가 식어버리는 사랑을 반복하고 또 반복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전혀 배우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좋은 시간에도 나쁜 시간에도 꾸준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조금 기분이 나쁘다고 토라져버리고 영영 다시 안 볼 것처럼 분노하고 화를 내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 피상적인 사랑은 아무것도 치유하지 못합니다.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모든 것의 치유제가 됩니다.

우정과는 달리 남녀간의 사랑은 그 결과물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로 ‘자녀’이지요. 그래서 남녀간의 사랑에는 보다 중대한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냄비 같은 성적 흥분 속에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는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라 그 쾌락의 부차적인 결과물로 취급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 뒤의 모든 고난을 아무 탓이 없는 그 아이가 짊어지게 되지요. 성경 안에서 남자의 욕정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랭이 같은 자들이 곧잘 저지르는 일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가르침을 얻어야 가능합니다. 물론 대학교를 가야 한다거나 높은 수준의 학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참사랑은 배워야 합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서 배우는 것이지요. 모두가 진정한 사랑에 맛들이는 그날까지 열심히 서로에게 가르치고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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