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찾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자신의 욕구의 충족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축복’이라고 이름 붙여 버립니다. 참된 축복이라는 것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의 완수’입니다. 그리고 그 뜻의 이루어짐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직 하느님만이 진정으로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벗어난 ‘좋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마음에 들어 좋아 보인다고 해도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는 결코 좋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즉, 누가 제 아무리 많은 돈을 번다고 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부분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정말 엉뚱한 축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지요. 예수님에게 축복이라는 것은 당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삼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땀을 흘릴 정도로 그것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영광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진정 축복된 존재로 거듭나셨지요. 사람들은 오직 그 ‘영광’만을 탐하고 그것을 훔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광을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복도 입지 않은 채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예복을 구하지 않은 자는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하느님으로 섬긴 자들, 그들이 들어갈 곳은 자신의 뜻이 주인이 되는 나라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들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합당한 나라에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축복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 그들은 축복을 갈구하겠지만 아무리 축복을 부어주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것의 의미조차 모른 채 그것을 밟고 축복을 부어주는 자를 물어 뜯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우리의 축복은 ‘고통과 고난’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마치 요나 예언자에게 자신의 예언직이 수난 그 자체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정말 엉뚱한 축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예는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지요. 예수님에게 축복이라는 것은 당신의 몸을 희생제물로 삼아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이 내려주신 ‘영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피땀을 흘릴 정도로 그것에 대해서 거부하고 싶었지만 결국 그 영광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진정 축복된 존재로 거듭나셨지요. 사람들은 오직 그 ‘영광’만을 탐하고 그것을 훔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광을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복도 입지 않은 채로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지요. 예복을 구하지 않은 자는 혼인잔치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자신의 뜻을 하느님으로 섬긴 자들, 그들이 들어갈 곳은 자신의 뜻이 주인이 되는 나라입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나라’에는 그들이 머물 자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합당한 나라에 거주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축복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 그들은 축복을 갈구하겠지만 아무리 축복을 부어주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는 것의 의미조차 모른 채 그것을 밟고 축복을 부어주는 자를 물어 뜯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우리의 축복은 ‘고통과 고난’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지요. 마치 요나 예언자에게 자신의 예언직이 수난 그 자체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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