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앞에 눈 먼 사람 둘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믿음’으로써 그분이 지닌 권능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는 그대로 얻을 수 있었지요. 다른 수많은 이들이 그 순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지나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두 장님들이 보는 것을 쉽사리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변 사람들은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고서야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장님 둘은 그 이상을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함구령, 즉 입을 다물라는 명령의 필요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환희에 가득 차서 그분의 명을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의 소문이 그 지방 일대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번 치유를 드러나지 않게 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들에게 함구령도 내린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 이유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소문을 퍼뜨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말았지요.
지금의 우리의 삶 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선에서는 가장 현명하게 행동한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더 많은 오류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님의 기적사화 안에는 단순히 두 장님이 눈을 여는 이야기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점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보다 간절히 원하셨던 복음선포에 제약을 받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서 더 가르치고 싶었지만 ‘치유사’로서 소문이 더 퍼져 버리고 만 것이지요.
선교지에서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사는 복음의 말씀,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이어야 합니다. 헌데 그가 선교지마다 들고간 사탕이 더 위력을 발휘해서 아이들이 사탕을 먹으러는 오는데 말씀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괴상한 모습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아 이겨내고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다가오는 이유는 ‘사탕’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어주고 생활을 돌보아 주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소중한 것이지만 핵심을 상실한 채로 그런 활동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죽은 사람을 살려도 그 사람은 훗날 다시 죽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더 확실히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지 못한 채로 조금 아는 것을 내세우다가는 쓰러지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이 장님 둘은 그 이상을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함구령, 즉 입을 다물라는 명령의 필요성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환희에 가득 차서 그분의 명을 이행하지 않았고, 결국 예수님의 소문이 그 지방 일대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번 치유를 드러나지 않게 행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집 안으로 들어간 것이고 그들에게 함구령도 내린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그 이유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소문을 퍼뜨리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고 말았지요.
지금의 우리의 삶 안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선에서는 가장 현명하게 행동한다고 스스로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보지 못하는 것들 때문에 더 많은 오류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님의 기적사화 안에는 단순히 두 장님이 눈을 여는 이야기만 들어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보지 못한 점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보다 간절히 원하셨던 복음선포에 제약을 받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서 더 가르치고 싶었지만 ‘치유사’로서 소문이 더 퍼져 버리고 만 것이지요.
선교지에서의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사는 복음의 말씀,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이어야 합니다. 헌데 그가 선교지마다 들고간 사탕이 더 위력을 발휘해서 아이들이 사탕을 먹으러는 오는데 말씀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괴상한 모습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결국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말씀이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많은 괴로움을 받아 이겨내고 스스로 성장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이 다가오는 이유는 ‘사탕’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건물을 지어주고 생활을 돌보아 주고 하는 모든 행위들은 소중한 것이지만 핵심을 상실한 채로 그런 활동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죽은 사람을 살려도 그 사람은 훗날 다시 죽을 뿐 별다른 의미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보다 더 확실히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지 못한 채로 조금 아는 것을 내세우다가는 쓰러지기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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