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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일꾼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마태 9,37)

정말 수확할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일꾼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 신부님, 하지만 한국에는 사제가 넘쳐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보좌를 십년씩이나 한다고 하던데요?

네, 한국에 본당을 맡을 사제는 넘쳐납니다. 하지만 영혼들을 초대할 일꾼들이 부족합니다. 신앙생활은 본당 미사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당의 주일미사라는 것은 우리에게 자양분을 내어주고 우리가 각자 해야 할 일을 도와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주일의 한두 시간으로 축소시켜 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은 주일 미사를 나오고 그날 저녁에 술자리에 가서 미친듯이 술을 퍼마시고 온갖 추접한 이야기를 하고 누군가를 험담하고 자기들끼리 다투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은 아침 저녁 기도만 꼬박 바치면서 그 밖의 일들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신경써야 할 일들, 즉 이웃을 돌보고 세상 안에서 주어진 책임에 충실하고 힘든 일에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인내로이 견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을 듣고, 나는 그 누구도 죽인 적이 없으니 아무 상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를 증오하고 그 원한을 내면에 간직하면서 곱씹는 것을 돌이켜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참된 가르침을 기다리는 수많은 이들이 있고, 이 역할은 당연히 그를 위해서 수련을 쌓은 사제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사제들은 이 세상에 뿌려진 목동들인 셈이지요. 양들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가 나올 수는 있지만 양들을 풀밭으로 인도해야 할 최종 책임자는 목자들, 즉 사제들입니다.

생각만큼 일꾼이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선을 넓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 본당에 평일미사 참례하는 숫자가 어느 정도 된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의 양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밖의 양들을 더 신경써야 합니다. 일꾼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수확할 영혼들은 널리고 널렸습니다. 선교한다는 핑계로 단골 술집에 갈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들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고 감사 드리면서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나서도 ‘저희는 주님의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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