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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자비

“결국 정말 마지막에 가서는 하느님은 모두 용서하실 것 같아요.”

누군가가 한 주장입니다. 설명을 시도하다가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제 말을 인내로이 들을 마음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주장을 한다고 너무나 바빴습니다. 하느님의 선함과 자비로우심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지옥이고 뭐고 나중에는 다 사라져 버린다고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신 분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용서는 우리의 전 생애를 아우르고 심지어는 죽음 이후에도 그분의 자비는 지속됩니다. 우리는 지극히 도식적인 사고로 천국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이 사랑하고 지옥에 있는 이들은 하느님이 극도로 미워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옥에 있는 이들에게 마저도 하느님이 나름의 자비를 지니고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이해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것이라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상상을 할 뿐입니다. 그 누구도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알 도리는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가장 하느님에게 가까이 머물러 있는 분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는 가기 싫은 지옥에 억지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해서 그리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선택을 계속해서 지속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럼 그 선택이 영원 안에서 바뀔 수는 없는가? 만일 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지옥이 아니라 ‘연옥’이 되는 것입니다. 지옥이 지옥인 이유는 자기 스스로 영원한 선택을 한 이들이 모여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장소와 시간의 개념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일 뿐입니다. 영원 안에서 이 장소와 시간은 존재하지만 무용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3차원의 영역 안을 자유로이 이동하면서 2차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이해는 하고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 차원 안에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3차원을 기본 바탕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2차원은 우리의 개념속에서만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종이에 선을 긋고 2차원의 영역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펜선은 실제로는 3차원의 영역을 지니고 있습니다. (머리 복잡한 이야기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벗어나게 되는 날, 우리는 전혀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저 ‘새로운 땅, 새로운 하늘’ 정도로 표현되고 말지요. 기껏해야 예수님이 드러내신 모습들로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벽을 통과하고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하는 식이지요.

그러한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진 천국과 지옥은 사실상 신비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알려 주셨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6)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9)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태 10,2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9,48)

이러한 것들이 그저 후대에 인간들이 덧붙인 것이라고 해 버린다면 저로서는 더는 할 말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모두 부정해 버리는 도구가 생긴 셈이니까 그와 대화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앙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산 이와 죽은 이의 심판을 말이지요.

하느님의 자비는 영원에 이르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자비는 자격이 있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하늘 나라의 가장 높은 성인도 하느님의 자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영원의 행복에 머무르는 그 어느 누구도 ‘합당함’을 따진다면 지금의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는 그 자비를 마지막까지 저버리는 이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그것을 심판할 수는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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