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세례자 요한보다 더 위대한

세례자 요한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극기의 최대한도를 살아 내었습니다. 그는 은수자였으며 가장 험한 복장과 가장 거친 음식을 먹고 고행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고 한도의 고행을 한다고 해도 세례자 요한에 버금가는 극기의 행위를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마르코 1,6)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고백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는 마치 종만도 못한 존재로 스스로를 고백합니다. 헌데 예수님은 과연 어떤 고행을 하셨을까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그분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압니다. 하지만 그분의 공생활은 극기라기보다는 도리어 ‘축제’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그분은 먹고 마시고 사람들과 어울리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가르치고 밤마다 기도하시기는 했지만 특별히 예수님이 극도의 고행을 행하셨다고 하는 모습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물론 당신이 받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셨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과연 세례자 요한의 극기의 행위, 이 세상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법한 극기를 실천한 이 예언자는 과연 무엇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일까요?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옛 약속, 즉 구약의 마지막 인물로 평가됩니다. 물론 동시에 신약을 여는 인물이 되기도 하지요. 세례자 요한의 극기가 상징하는 것은 율법의 최고의 준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법적으로 전혀 하자가 없는, 법적인 의로움을 극도로 달성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삶에는 법적으로 흠잡을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모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세례자 요한의 경건하고 거룩한 삶 앞에서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인물이 다가오는 인물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분이 누구신지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하느님의 외아들, 사람이 되어 다가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에게서 단 하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결국 법이 사랑에 무릎을 꿇은 것이지요. 규율은 사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지켜야 할 규율이라도 진정한 사랑, 참된 사랑이 다가온다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도 고쳤고, 손을 씻지 않고도 밥을 먹었으며, 제자들이 밀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사랑스런 눈길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위대한 사람임에 틀림없고 전이나 후로나 다시는 그런 인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 있는 그 누구라도 그보다는 위대합니다. 즉, 우리는 ‘사랑’의 과업을 완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법을 지키려 여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