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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공감하는 데에서 하느님의 자녀의 길이 시작됩니다. 이 관점으로 성경 안에서 언급되는 내용들을 살펴보아도 그 구심점을 찾게 됩니다.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느님의 지체의 구성원 자격이 있게 마련입니다.

내 바로 곁의 이웃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죽어가는 데 그걸 뻔히 알면서도 제 잇속을 차리는 데에 정신이 없다면 그 행위 자체로 그는 스스로를 주님의 지체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나 자신이 바로 그런 고통의 유발자라면 그것은 더더욱 말할 나위 없지요.

하느님이 세상을 만든 이유는 서로 도와 사랑을 이루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서로 돕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필요하기에 서로 부족함을 선물로 주셨지요. 만일 모두가 완벽했다면 우리가 굳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이유도 없이 나 자신의 완벽함으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부족한 존재들이고 그로 인해서 서로를 미워하기도 하지만 사실 하느님은 그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를 채워 가며 살아가기를 바라셨던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이의 아픔을 공감하겠다는 것도 사실은 오기에 불과합니다. 범위를 너무 지나치게 크게 잡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의 아픔이 나를 온통 괴롭혀서 나에게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니까요.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우리 주변의 이웃들입니다. 특별히 아픈 지체가 있을 때에 때로 필요하다면 그 지체를 위해서 모든 몸이 움직일 필요도 있지만 24시간을 모든 몸이 그 지체에만 붙어 있게 된다면 결국 모든 몸이 서서히 죽어가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 곁의 이웃에게서부터 우리의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지체를 아우르는 시선은 오직 하느님 한 분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까이 있는 이웃은 돌보아 주십시오. 이웃을 돌본다는 것을 ‘돈을 얼마를 내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축소 시키지 마십시오. 도움은 부자 나라일수록 더욱 절실합니다. 모든 것의 근본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부족’은 부유한 나라일수록 사실은 더욱 심각합니다. 사람들은 부유하고 편안해지는 만큼 내적인 연대를 잃어가기 시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유하고 편안한 삶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공감대를 망각하게 해 버리는 것이지요.

첫 마음을 되새기십시오. 우리는 어릴 때에 아파하는 강아지를 보고도 마음 아파 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의 그 감수성을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냉냉한 가슴을 지니는 것이라 착각하지 마십시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따스한 가슴을 바탕으로 삶의 경험 속에서 지혜를 더욱 키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차가운 어른을 보는 것만큼 가슴아픈 일도 없습니다.

누가 이웃이냐구요? '나 말고는 돌볼 사람이 없는 그'가 이웃입니다. 돌본다는 것이 단순히 그가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야 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돌봄의 의미는 보다 영적인 차원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길을 모르는 모든 사람은 돌봄이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선교', 또는 '복음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선교하지 않는 사람, 복음화에 동참하지 않는 사람은 주변에 그 누구도 복음화할 대상이 없는 파라다이스에 살고 있거나, 아니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망각하여 하느님의 지체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먼 훗날 여러분들이 하느님 앞에 셈을 하게 될 때, 하느님은 반드시 물으실 것입니다. '내가 그래서 그 사람을 너에게 맡기지 않았더냐?'라고 말이지요. 그러면 적지 않은 이들이 말문이 막히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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