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이들은 주님 안에서 기쁨에 기쁨을 더하고,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이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포악한 자가 없어지고 빈정대는 자가 사라지며, 죄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모두 잘려 나가겠기 때문이다. (이사 29,19-20)
의롭고 열매를 맺는, 즉 다른 이들을 이끄는 자
길은 알지만 약한 자
악의는 없으나 어리석어 길을 찾지 못하고 죄 중에 머무르는 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
죄 중에 있으면서 타인도 죄를 짓게 하는 자
물론 더욱 세부적인 단계들이 존재하지만 큰 덩어리만 놓고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저런 단계들을 왔다 갔다 하곤 하지요. 물론 급작스레 왔다 갔다 하진 않습니다. 단계들을 넘어설 때마다 많은 결심과 시행착오와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특별한 은총으로 단숨에 뛰어넘는 자들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내적 고통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우두머리의 마음에 들고자 합니다. 길을 바꾸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길을 바꾸면 비록 약할지언정 그분의 나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을 바꾸지 못하면 설령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잘려 나갈’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가난함과 부유함은 단순히 우리가 지닌 세상 사물의 많고 적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가난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도 지닐 수 있습니다. 언뜻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삶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분은 어쩔 수 없이 부유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생활하시는 곳의 벽이 흔들거리지는 않지요. 그저 신던 낡은 구두를 계속 신으시고 어딘가에 갈 때 작은 차를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진정한 가난은 그런 외적 표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하느님 외에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외의 가난은 외적 표지일 뿐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적으로 극도의 부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이렇지 돈만 벌어봐, 다들 각오하고 있으라구!’라는 생각이라면 그는 사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엄청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외적으로 가난하지만 내적으로 지독히 포악하고, 타인을 빈정거리며, 죄 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럴 자금이 없어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런 지표로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층 아파트에 산다고 무조건 악덕 부자가 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볼리비아라는 나라에서 선교 사제로 살아간다고 무조건 선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난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의롭고 열매를 맺는, 즉 다른 이들을 이끄는 자
길은 알지만 약한 자
악의는 없으나 어리석어 길을 찾지 못하고 죄 중에 머무르는 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
죄 중에 있으면서 타인도 죄를 짓게 하는 자
물론 더욱 세부적인 단계들이 존재하지만 큰 덩어리만 놓고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저런 단계들을 왔다 갔다 하곤 하지요. 물론 급작스레 왔다 갔다 하진 않습니다. 단계들을 넘어설 때마다 많은 결심과 시행착오와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특별한 은총으로 단숨에 뛰어넘는 자들도 있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엄청난 내적 고통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우두머리의 마음에 들고자 합니다. 길을 바꾸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길을 바꾸면 비록 약할지언정 그분의 나라에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길을 바꾸지 못하면 설령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잘려 나갈’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가난함과 부유함은 단순히 우리가 지닌 세상 사물의 많고 적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가난은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도 지닐 수 있습니다. 언뜻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가난한 삶을 선택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분은 어쩔 수 없이 부유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생활하시는 곳의 벽이 흔들거리지는 않지요. 그저 신던 낡은 구두를 계속 신으시고 어딘가에 갈 때 작은 차를 이용하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진정한 가난은 그런 외적 표지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그분의 가난은 ‘하느님 외에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외의 가난은 외적 표지일 뿐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적으로 극도의 부유함을 지닐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이렇지 돈만 벌어봐, 다들 각오하고 있으라구!’라는 생각이라면 그는 사실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엄청 부유한 사람입니다. 그는 외적으로 가난하지만 내적으로 지독히 포악하고, 타인을 빈정거리며, 죄 지을 기회를 엿보는 자입니다. 다만 지금은 그럴 자금이 없어 못하고 있을 뿐이지요.
이런 지표로 스스로를 성찰해야 합니다. 내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고층 아파트에 산다고 무조건 악덕 부자가 되는 게 아니고, 반대로 볼리비아라는 나라에서 선교 사제로 살아간다고 무조건 선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난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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