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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과 정의

공정과 정의라는 것을 쉽게 이해하려면 몸을 떠올리면 됩니다. 우리의 몸은 스스로에게 공정하고 정의롭습니다. 그 말이 곧 모든 지체를 동등하게 돌본다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카락은 머리카락 나름대로, 눈은 눈대로, 귀는 귀 대로의 쓰임새가 있고 그것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정과 정의의 개념입니다.

문제는 이 공정과 정의를 어느 범위에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공정과 정의의 축소된 개념들이 탄생합니다. 소위 한 나라의 공정과 정의가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 공정과 정의는 다른 나라에 부당과 불의가 되는 것이지요.

본격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몸에서 새끼 손가락이 다치면 모든 몸이 온 힘을 다해서 그 다친 손가락을 돌보는 데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 다친 손가락이 정상 기능을 회복할 때까지 도움을 주지요. 그렇게 치료가 되고 나면 새끼 손가락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과 정의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서로의 이득을 위해서 움직입니다. 전 세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지역별로도 갈라지고 단체 간에 갈라지고 결국 개인간에도 서로 갈라지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를 몸에다 비유를 하면 지체들이 서로의 중요성을 부르짖지만 그 누구도 전체를 아우르는 시선으로 모두를 바라보는 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를 몸에다 비유하자면 오른손은 오른 손대로의 이득을 추구하고 발은 발대로 이득을 추구해서 그 어느 누구도 다친 눈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눈이 점점 썩어 들어가고 결국 전체 몸을 위태롭게 할 것인데 그것을 눈치채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정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바라보는 시각으로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지만 하느님의 마음을 이어받지 않고서는 참된 의미의 공정과 정의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시선을 들어 높일 수 있다면 우리는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선에서 가장 필요한 곳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엉뚱하게도 그저 내 귀에 들리는 소리 가운데에서 가장 매혹적인 것을 골라 그 길을 따라가기 바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공정과 정의를 배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분의 공정과 정의는 단순히 인간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피조계는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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