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수많은 강의와 강연,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씹고 씹고 또 씹어 삼켜야 겨우 향이 배어나오는 말라 비틀어진 육포 같은 강론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심지어는 말하는 이 자신조차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강론을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어떻게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을까요? 왜 그분의 말씀과 성경 풀이는 남달랐던 것일까요? 그분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신 걸까요?
그분은 이미 당신이 가르치는 바를 드러내셨고 우리는 그 결과물을 ‘성경’이라는 형태로 쥐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분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삶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의 반만 알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말씀이라는 것은 삶과 더불어 가지 않으면 공허함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삶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였지요.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사람들은 그분의 삶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당신을 드러낼 예수님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남기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말씀을 생생하게 생활화하는 이들이 되어 말씀의 나머지 반을 완성시키라는 의미였지요.
결국 우리는 오늘날 마음을 타오르게 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바로 사제들의 메마른 강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들의 메마른 신앙생활입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열정을 담은 강론은 그 자체로 힘을 실어 줍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 사제가 단순한 의무감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강론을 하는지, 아니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신앙인들에게 빛을 전해주고자 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의 열정을 실제로 삶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신앙인들은 지극히 적고 단단한 음식이라도 거뜬히 소화해 냅니다. 이미 힘든 시련을 겪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신앙인들은 그 어떤 사제의 강론이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갈 힘을 발견해냅니다.
누구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그의 탓이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는 사제를 탓하고, 사제는 신자들을 탓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라도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마음을 불태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수많은 강의와 강연, 그리고 미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강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부족합니다. 사람들은 씹고 씹고 또 씹어 삼켜야 겨우 향이 배어나오는 말라 비틀어진 육포 같은 강론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심지어는 말하는 이 자신조차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강론을 들어야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어떻게 마음을 타오르게 하셨을까요? 왜 그분의 말씀과 성경 풀이는 남달랐던 것일까요? 그분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쓰신 걸까요?
그분은 이미 당신이 가르치는 바를 드러내셨고 우리는 그 결과물을 ‘성경’이라는 형태로 쥐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분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삶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의 반만 알고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말씀이라는 것은 삶과 더불어 가지 않으면 공허함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당신의 삶도 우리에게 선물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체성사의 신비였지요.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사람들은 그분의 삶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당신을 드러낼 예수님이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남기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분의 말씀을 생생하게 생활화하는 이들이 되어 말씀의 나머지 반을 완성시키라는 의미였지요.
결국 우리는 오늘날 마음을 타오르게 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바로 사제들의 메마른 강론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들의 메마른 신앙생활입니다.
하느님의 진정한 열정을 담은 강론은 그 자체로 힘을 실어 줍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것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 사제가 단순한 의무감으로 울며 겨자먹기로 강론을 하는지, 아니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서 신앙인들에게 빛을 전해주고자 하는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편, 하느님의 열정을 실제로 삶 속에서 이루어내려는 신앙인들은 지극히 적고 단단한 음식이라도 거뜬히 소화해 냅니다. 이미 힘든 시련을 겪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는 신앙인들은 그 어떤 사제의 강론이라도 그 안에서 자신이 살아갈 힘을 발견해냅니다.
누구를 탓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그의 탓이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신자는 사제를 탓하고, 사제는 신자들을 탓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오히려 지금부터라도 예수님과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모습을 본받아 마음을 불태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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