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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지 못하는 이유

이해하지 못해서 믿지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본질적으로 이해의 지평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다 이해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믿기를 결심하는 거지요. 우리가 믿지 못하는 이유는 대부분 우리 자신의 교만에서 기인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의심스럽게 하는 자들’ 때문에 그렇지요.

인간의 교만은 자신보다 위대한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합니다. 설령 받아들인다 해도 전혀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는 듯이 받아들이곤 하지요. 즉, 하느님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에너지, 결정적으로 나의 삶과 별로 상관없는 존재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식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정당하게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시지요.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인간의 교만은 시초부터 끊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믿음을 가로막는 것은 ‘의심스럽게 하는 자들’입니다. 이 표현은 단순히 그릇된 진리를 전하는 이교집단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참된 가르침을 가리우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교회 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의 진실한 뜻을 가리고 엉뚱한 것을 보다 중요한 듯이 말하고 다니는 이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믿음을 가지려는 자들 앞에서 드러내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들이라 순진한 사람들은 참된 믿음 자체를 가지는 것을 주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존재를 대뜸 사랑하고 믿는다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참된 믿음에 이르는 것이지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올바로 드러내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지요. 그리고 교회의 성실하고 충실한 삶의 증거로 믿음에서 멀어져 있던 이들도 믿음을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 사람들이 믿는가 믿지 못하는가 하는 것은 그 사명을 지닌 교회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어떤 모습을 드러내는가에 따라서 그들은 믿음을 가질 수도, 또는 반대로 내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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