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은 오늘날의 잣대로 치면 지극히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던 분으로 묘사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같은 시대에 ‘저는 당신의 종이오니’와 같은 표현은 여성 비하 발언이라는 공분을 사고도 남겠지요. 그리고 무슨 일이든 거기에서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담아 두셨다는 것도 불만거리가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겨우 찾은 소년 예수가 말대꾸를 하는대도 그걸 듣고만 있고, 또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여인아’(이 여자야)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도 대꾸 하나 하지 못하고 ‘그가 하라는 대로 하여라’라고 다른 종들에게 분부한 것을 들으면 아주 폭발할 지경이 될 것입니다.
과연 성경에서 바라는 여성의 모범적인 모습이 이것이란 말입니까? 과연 온유와 정숙이란 무엇이란 말인지요? 그러한 것이 온유와 정숙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에서 손을 놓고 떠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잠깐 화제를 바꾸어서 요셉의 삶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건 어쩌면 더 가관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내, 가장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생각한 아내가 덜렁 임신을 해 왔습니다. 돌무더기로 내리 찍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녀를 받아들이라고 ‘꿈에서’ 분부를 듣습니다. 신혼 생활은 고역이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이방 마을로 가서 출산을 해야 했고, 또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가 시작되어 더욱 더 먼 나라로 떠나야 했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압제자가 죽고도 마을로 곧바로 돌아오지도 못합니다. 그냥 그 아내를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스스로 등에 지고 다니는 셈입니다. 이게 무슨 ‘남성상’이란 말입니까? 오늘날의 남자들이 보면 기를 찰 노릇이지요. 요셉은 그냥 멍청한 남편상일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내적인 가치를 설명하는 말을 듣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되새기지는 못합니다. 즉, 온유와 정숙을 듣지만 그 각각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지요. 인내와 겸손을 들어도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는 익숙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사고 싶은 것”
“신상 핸드백”
“가격대비 최고 상품”
“최신 유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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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극히 피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내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배우기에 앞서 일단 거부감을 표출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들어도 일단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발심에 당혹해 합니다. 여성의 인권을 무너뜨리는 것 같은 성경의 표현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은 성경의 표현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지요.
결국 ‘십자가’ 자체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일 뿐이고, 어리석음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십자가’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영광’을 탐하지요. 그리고 그 영광이라는 것조차도 올바른 이해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영광, 명예, 드높음과 혼동을 하고 있지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일상 안에서의 거룩함을 보고 막연히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도전들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이끌어 가실까요? 그것은 하느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날고 싶다면 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이상을 너무 높이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과연 성경에서 바라는 여성의 모범적인 모습이 이것이란 말입니까? 과연 온유와 정숙이란 무엇이란 말인지요? 그러한 것이 온유와 정숙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에서 손을 놓고 떠나가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잠깐 화제를 바꾸어서 요셉의 삶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이건 어쩌면 더 가관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한 아내, 가장 순결하고 정숙하다고 생각한 아내가 덜렁 임신을 해 왔습니다. 돌무더기로 내리 찍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녀를 받아들이라고 ‘꿈에서’ 분부를 듣습니다. 신혼 생활은 고역이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이방 마을로 가서 출산을 해야 했고, 또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해가 시작되어 더욱 더 먼 나라로 떠나야 했습니다. 박해가 끝나고 압제자가 죽고도 마을로 곧바로 돌아오지도 못합니다. 그냥 그 아내를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을 스스로 등에 지고 다니는 셈입니다. 이게 무슨 ‘남성상’이란 말입니까? 오늘날의 남자들이 보면 기를 찰 노릇이지요. 요셉은 그냥 멍청한 남편상일 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는 내적인 가치를 설명하는 말을 듣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되새기지는 못합니다. 즉, 온유와 정숙을 듣지만 그 각각의 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지요. 인내와 겸손을 들어도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들에는 익숙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사고 싶은 것”
“신상 핸드백”
“가격대비 최고 상품”
“최신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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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극히 피상적인 삶을 유지하면서 내적인 가치들에 대해서 배우기에 앞서 일단 거부감을 표출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들어도 일단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반발심에 당혹해 합니다. 여성의 인권을 무너뜨리는 것 같은 성경의 표현들,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것 같은 성경의 표현들 속에서 혼란스러워하지요.
결국 ‘십자가’ 자체는 사람들에게 스캔들일 뿐이고, 어리석음일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십자가’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저 ‘영광’을 탐하지요. 그리고 그 영광이라는 것조차도 올바른 이해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세속의 영광, 명예, 드높음과 혼동을 하고 있지요. 소화 데레사 성녀의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일상 안에서의 거룩함을 보고 막연히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자신의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도전들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이끌어 가실까요? 그것은 하느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날고 싶다면 날 수도 있겠지만, 이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이상을 너무 높이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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