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사도 4,13)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의 반대편에는 유식하고 비범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이들로 가득합니다. 유식하고 비범한 이들 말이지요. 이들은 지식도 많고 재주도 많습니다. 아는 바가 엄청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이들의 말을 듣지요.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그러한 유식과 비범이 크게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무식함과 평범함을 통해서 도리어 더 큰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기댈 수 있는 것이 많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에 더 마음을 둘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특별한 신앙이 있어서 돈이 엄청 많은데도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돈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거기 들러붙게 됩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을수록 남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 뿐이게 됩니다. 상황이 더 절박할수록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더는 돈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을 찾곤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너무 늦은 때에 그렇게 합니다.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열매는 추수의 시기에 익어야 합니다. 추수의 시기가 다 지났는데 뒤늦게 익어 버리면 까치밥이 될 뿐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반드시 하느님에게 응답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것들에 매달려 있다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하느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이미 하느님은 다른 도구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듯이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느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지 못한 영혼은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모든 세상을 정돈하여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보하기를 배우지 못하며 이웃의 필요를 살피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어야 하는 보조적인 존재에 불과하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실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전혀 중심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지요.
사도들의 무식과 평범함은 도리어 지도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것은 ‘신앙’ 뿐이었습니다. 그 신앙 안에서 그들은 용감해질 수 있었고 자신있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신의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절대로 세상의 어느 힘에 의해서 굴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요.
스스로 무식하고 평범하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에게 믿음의 축복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식과 평범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기여할 것입니다.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의 반대편에는 유식하고 비범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런 이들로 가득합니다. 유식하고 비범한 이들 말이지요. 이들은 지식도 많고 재주도 많습니다. 아는 바가 엄청나고 할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이들의 말을 듣지요.
그러나 말씀을 전하는 데에는 그러한 유식과 비범이 크게 유용하지 않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무식함과 평범함을 통해서 도리어 더 큰 복음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베드로와 요한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기댈 수 있는 것이 많게 됩니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마음을 떼어놓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것에 더 마음을 둘 수 밖에 없습니다. 정말 특별한 신앙이 있어서 돈이 엄청 많은데도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돈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마음이 거기 들러붙게 됩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을수록 남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 뿐이게 됩니다. 상황이 더 절박할수록 그렇습니다. 적지 않은 부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더는 돈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서야 하느님을 찾곤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너무 늦은 때에 그렇게 합니다.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열매는 추수의 시기에 익어야 합니다. 추수의 시기가 다 지났는데 뒤늦게 익어 버리면 까치밥이 될 뿐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자신이 반드시 하느님에게 응답해야 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다른 것들에 매달려 있다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하느님께 부르짖어 보지만 이미 하느님은 다른 도구를 쓰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마치 우리가 우주의 중심인 듯이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의식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느끼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지 못한 영혼은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모든 세상을 정돈하여 살고자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양보하기를 배우지 못하며 이웃의 필요를 살피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어야 하는 보조적인 존재에 불과하지요. 그러다가 나중에 실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전혀 중심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것이지요.
사도들의 무식과 평범함은 도리어 지도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게 됩니다. 그들이 지닌 유일한 것은 ‘신앙’ 뿐이었습니다. 그 신앙 안에서 그들은 용감해질 수 있었고 자신있게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자신의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희망은 절대로 세상의 어느 힘에 의해서 굴복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지요.
스스로 무식하고 평범하다고 좌절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느님에게 믿음의 축복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무식과 평범은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되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 기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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