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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에게 이끌리는 이들

미끼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그것을 바라는 마음이 형성된 이유는 우리가 꾸준한 선택을 통해서 그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첫 우리의 욕망은 순수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엄마 젖이나 먹으면 만족하고 편안하게 잠을 잘 줄 알았습니다. 헌데 지성이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선택의 범위가 늘어나게 되고 그 가운데 ‘더 나은 것’을 찾는 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도 근본에는 ‘나 자신’을 위한 방향이 존재했습니다. 나를 위해서 더 나은 무언가를 찾는 것이지요. 바로 거기에서부터 우리의 이기성이 작용을 했던 셈입니다.

나아가 부모의 영향도 작용을 합니다. 나는 아무런 옷이나 입어도 상관이 없는데 부모의 선호도가 아이들에게 작용을 하는 것이지요.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가르치기보다는 더 비싼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아이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좋은 옷은 ‘가격표’가 높이 책정된 옷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 안에서 형성된 선호도로 인해서 우리는 결국 ‘유혹’에 시달리게 됩니다. 더 좋은 무언가를 간절히 하고 싶은 마음이 내면에 있는데 그것을 쉽게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면 놓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정치가들이 이런 저런 유혹에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이끌림이니까요. 더 많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고 어떤 일을 덥석 깨물었다가 나중에 호되게 당하는 것이지요.

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림’을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내적 가치에로의 이끌림을 느끼는 이들이지요. 이들 역시도 선택을 한 이들입니다. 이들이라고 세상의 유혹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육체의 안락함을 추구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알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좋은 것들을 모두 알지요. 하지만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세상의 것들이 결국 가져오게 되는 ‘허무’를 통찰한 셈이니까요.

아무리 밥을 잘 먹어도 하루 일정량 이상은 무리고, 아무리 좋은 차를 구입하더라도 그때 뿐이며,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시간이 흐르면 또 익숙해져버린다는 것을 스스로의 통찰로 깨닫게 된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전혀 다른 것을 원하기 시작하지요. 바로 내면의 가치들, 보다 영속성을 띤 가치들, 나아가 영원하신 분을 말이지요.

그들의 여행은 녹록치 않습니다. 세상이 달음질치는 방향에서 돌아서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지요. 세상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경우에 그들을 질투하고 시기하고 반대하기 시작합니다. 모두가 ‘이것이 중요하다!’고 외치는 순간에 그들은 ‘그것보다는 전혀 다른 것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여달라고 하면 그들은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라고 하지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데 보여주지는 않고 내면에는 평화로움을 지니고 사니 샘이 나서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답은 우리 스스로 찾는 법입니다. 누가 대신 찾아주는 게 아닙니다. 답을 찾는 과정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우리가 원치 않는다면 아예 시작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시작했다가 좌절하고 포기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꽃단장이 된 화려하고 편안한 길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시련과 수난이 예비된 길입니다. 각오를 다지지 않은 채로 겉멋만 들어 있으면 함부로 걸을 수 없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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