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사람들은 ‘방사능’이 치유의 효과가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이른바 과학의 시대였고 과학자들이 하는 말은 모두 신빙성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사능이 그득한 독극물을 약이랍시고 먹고 마시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합니다. 과학은 현대의 새로운 마술과도 같습니다. 과학은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한 것으로 뒤바꾸어 우리 앞에 내어 놓습니다. 과학으로 인해서 우리는 전기를 다루고 손에 들고 있는 모든 스마트폰으로 사이버 세상을 누릴 수 있으니 그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없는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을 만한 것들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도저히 믿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났지요. 사람들은 더는 신앙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과 같은 소리는 우스운 소리가 되어 버렸지요. 사람들은 ‘검증’되고 ‘증명’되지 않는 것은 거부합니다. 오직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감각되는 것’만을 신봉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정반대로 속기도 하는 것입니다. 눈 앞에 증거물을 보여주긴 하는데 그의 마음의 근본 의도를 바라보진 못하니 유혹에 빠져들고 속아 넘어가는 것이지요. 신흥 종교들이 판을 칠수 있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혹할만한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니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너무나 쉽게 믿어 버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쓰디쓴 악한 의도는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셈이지요. 저마다 제 짝을 찾아 떠난 셈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진실함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에는 진실함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와 같은 것은 낡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버 버렸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지만 실제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면모의 신앙생활을 할 뿐, 그 안에 실제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사제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에 대해서 의심하고, 신앙인들도 그것을 받아 모시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삶은 예전 그대로 다시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과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교회의 커다란 건물을 믿고, 그 안에 구축된 단체들을 믿고, 본당의 유력한 세력들을 믿고, 재정 상태를 믿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신앙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주제가 되어 버렸지요. 신앙이라는 것이 신자로서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뭔지 진지하게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셈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믿는답시고 들어오긴 했는데 이제와서 솔직하게 자신을 살피려니 믿음 따위는 아무 상관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그렇다고 함부로 나가려니 괜히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의무’를 겨우 지키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주어지면 그것을 핑계로 당장 성당에서 멀어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입버릇처럼 ‘언젠가는 돌아간다’라고 하다가 생을 마치게 됩니다.
지금 제가 서술하는 것은 신앙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뢰라는 것은 지금 눈 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상대가 가지고 있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내가 돈을 빌려줄 때에 그 친구가 돌려줄지 아닐지를 드러내는 가시적인 지표는 없지만 그의 내면을 ‘믿고’ 돈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합당한 응답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믿음을 여러 대상을 바탕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장 크게 믿음을 두는 것은 신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돈을 믿습니다. 그 돈이야말로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굳게’ 믿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크게 틀렸습니다. 돈은 우리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돈은 그냥 사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을 두어야 할 대상은 믿을 만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소개합니다.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그분, 사실 이런 표현조차도 믿음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거슬리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자연’으로부터 기인하고 과학적인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지독히 싫어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모든 것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지요. 그리고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믿음을 두는 것에 자신의 주권을 내어 맡기는 셈입니다. ‘어리석음’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에게 믿음을 두는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믿음을 지닌 이들의 현실은 절망적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구원해준다고 하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이 이 지상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생각이 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은 이 지상에서 마쳐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두셨지요.
영원으로의 초대,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들로서 지닌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약속하셨고, 믿는 이들은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리고 영원으로 나아가지요.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 그 자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긍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마음 속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의지는 생생히 살아있어 우리가 선택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우리는 사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 결정대로 살아갑니다.
제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 척 허풍을 떨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당에 나가고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고 모든 신심활동을 참여한다 해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고 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이를 굳게 믿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과학을 신봉합니다. 과학은 현대의 새로운 마술과도 같습니다. 과학은 불가능해 보이던 것을 가능한 것으로 뒤바꾸어 우리 앞에 내어 놓습니다. 과학으로 인해서 우리는 전기를 다루고 손에 들고 있는 모든 스마트폰으로 사이버 세상을 누릴 수 있으니 그보다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없는 셈이지요.
그렇게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을 만한 것들을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도저히 믿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났지요. 사람들은 더는 신앙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죽은 이의 부활과 같은 소리는 우스운 소리가 되어 버렸지요. 사람들은 ‘검증’되고 ‘증명’되지 않는 것은 거부합니다. 오직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감각되는 것’만을 신봉하기 시작했지요.
그래서 정반대로 속기도 하는 것입니다. 눈 앞에 증거물을 보여주긴 하는데 그의 마음의 근본 의도를 바라보진 못하니 유혹에 빠져들고 속아 넘어가는 것이지요. 신흥 종교들이 판을 칠수 있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혹할만한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니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그들이 하는 말을 너무나 쉽게 믿어 버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쓰디쓴 악한 의도는 전혀 바라보지 못하는 셈이지요. 저마다 제 짝을 찾아 떠난 셈입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진실함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에는 진실함을 바탕으로 하는 신뢰와 같은 것은 낡은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버 버렸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지만 실제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면모의 신앙생활을 할 뿐, 그 안에 실제적인 신앙을 추구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감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사제가 미사를 드리면서 성체에 대해서 의심하고, 신앙인들도 그것을 받아 모시면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삶은 예전 그대로 다시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과연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이 땅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교회의 커다란 건물을 믿고, 그 안에 구축된 단체들을 믿고, 본당의 유력한 세력들을 믿고, 재정 상태를 믿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는 동안 신앙이라는 것은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주제가 되어 버렸지요. 신앙이라는 것이 신자로서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게 뭔지 진지하게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셈입니다.
마지못해 하는 신앙생활이 계속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일단 믿는답시고 들어오긴 했는데 이제와서 솔직하게 자신을 살피려니 믿음 따위는 아무 상관없게 되어버린 거지요. 그렇다고 함부로 나가려니 괜히 재수가 없을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먹기로 ‘의무’를 겨우 지키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사소한 계기라도 주어지면 그것을 핑계로 당장 성당에서 멀어져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입버릇처럼 ‘언젠가는 돌아간다’라고 하다가 생을 마치게 됩니다.
지금 제가 서술하는 것은 신앙을 잃어버린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은 신뢰를 의미합니다. 신뢰라는 것은 지금 눈 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상대가 가지고 있을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의지적으로 수용하는 것이지요. 내가 돈을 빌려줄 때에 그 친구가 돌려줄지 아닐지를 드러내는 가시적인 지표는 없지만 그의 내면을 ‘믿고’ 돈을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합당한 응답을 얻기도 하지만 반대로 배신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 믿음을 여러 대상을 바탕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가장 크게 믿음을 두는 것은 신이나 사람이 아니라 바로 ‘돈’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돈을 믿습니다. 그 돈이야말로 우리에게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준다는 것을 ‘굳게’ 믿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크게 틀렸습니다. 돈은 우리가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돈은 그냥 사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을 두어야 할 대상은 믿을 만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을 소개합니다.
인간에게 숨을 불어넣으신 그분, 사실 이런 표현조차도 믿음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거슬리는 표현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이 ‘자연’으로부터 기인하고 과학적인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주권을 빼앗기는 것을 지독히 싫어합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모든 것을 쥐고 있어야 한다고 착각하지요. 그리고는 어리석게도 자신이 믿음을 두는 것에 자신의 주권을 내어 맡기는 셈입니다. ‘어리석음’이지요.
하느님은 당신에게 믿음을 두는 인간을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믿음을 지닌 이들의 현실은 절망적일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자신을 구원해준다고 하다가 결국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이 이 지상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그들의 생각이 합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은 이 지상에서 마쳐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두셨지요.
영원으로의 초대, 그것이 우리가 믿는 이들로서 지닌 은총입니다. 하느님은 약속하셨고, 믿는 이들은 그 약속을 믿습니다. 그리고 영원으로 나아가지요. 그러나 이런 모습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 그 자체일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긍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도 마음 속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의지는 생생히 살아있어 우리가 선택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도, 거부할 수도 있는 우리는 사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 결정대로 살아갑니다.
제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 척 허풍을 떨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성당에 나가고 미사를 꼬박꼬박 나가고 모든 신심활동을 참여한다 해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고 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고 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저는 이를 굳게 믿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