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어머니

어머니의 최고봉은 단연코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연상하며 모십니다. 물론 하느님은 아버지의 가장 완전한 모습이시지요. 그리고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안에는 당연히 가장 완전한 어머니로서의 모습도 존재합니다. 세상을 낳으신 분이시고 돌보고 계신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 대한 부분이 부족해 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교회에 어머니를 선사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성모님이 바로 그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성모님에 대해서 찾아볼 수 있는 성경의 부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극히 조용하셨던 분이시고 성요셉 성인을 사랑하셨으며 예수님의 어린 시절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마음에 품고 깊이 묵상하셨고, 아들에게 정중하게 부탁을 하면서도 그분의 신적 권위에 순종하셨으며, 십자가 앞에서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셔야 했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를 아들로 맞아 돌보시고 돌봄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헌데 단순히 성경 안에만 어머니가 드러나는 것은 아니십니다. 어머니는 그야말로 교회의 어머니로서 우리들 앞에 직접 나타나시기도 하셨습니다. 수많은 발현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성모님을 직접 뵈었고 교회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것만 해도 과달루페, 파리, 라 살레트, 루르드, 파티마, 바뇌의 6곳이나 되고 비공식적인 것만도 수백건이 넘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에 대해서 알고있는 대표적인 교리는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 천주모친(하느님의 어머니), 동정잉태(성령으로 잉태하심), 몽소승천(당신의 육신과 더불어 하늘로 오르심)입니다. 이는 모두 교회의 전승과 당신의 발현 속에서 알려진 것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다른 교회 신자들은 동정잉태 외에는 인정하지를 않고 있지요. 지금은 성모님의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니 이정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아내’의 모범과 ‘어머니’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은 아내로서 요셉 성인을 신뢰했습니다. 요셉 성인이 이리로 가자 저리로 가자 함에도 성모님은 마땅히 머리로서의 가장의 명에 순종하셨지요. 출산 직전의 상태에도 남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에 순명하여 그 길을 뒤따르셨고,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도 남편이 꿈에서 들은 지시를 따라 피난을 가는 길에 군말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나아가 성모님은 어머니셨습니다. 아이를 온 마음을 다해서 돌보면서 지혜와 육신이 자라나게 도와주시고, 또 모든 일을 잘 살피고 마음 속에 간직하여 묵상하시면서도 단순히 우리 가족만이 아니라 언제나 주변을 보살피면서 가나의 혼인잔치 처럼 필요한 일에는 기꺼이 도움을 드리기도 하는 어머니셨지요.

우리는 성모님을 ‘여신’으로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분명한 인간이십니다. 그러나 인간들 가운데 단연코 앞자리를 차지하시는 분, 구원 역사를 새로이 시작할 새로운 하와이시지요. 우리는 교회의 자녀들로서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톨릭 신자들의 보화는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릅니다. 이를 모르고 자꾸만 없는 비난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훗날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어머니를 만날 때에 얼마나 후회를 할지는 뻔한 일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